삶을 엮는 손길

삶을 엮는 손길

삶을 엮는 손길

삶의 단편을 실로 잇고, 자연의 숨결을 감싸안은 채 펠트 위에 본질을 새기는 이지영 작가의 ‘아르 드 비브르’.

따뜻한 펠트 작업은 이지영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지영 작가의 책 ≪아르 드 비브르≫ 출간을 기념한 전시가 지난 3월 TDA 하우스에서 진행됐다. 작가의 작업실을 옮겨놓은 듯한 전시장 풍경.

핸드 크래프트 작가, 클래스 강사, 펠트 아티스트 등 이지영 작가를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는 자신을 ‘일상을 기록하는 작가’라고 소개한다. 최근 이지영 작가가 출간한 책 ≪아르 드 비브르 Art de Vivre≫는 그 일상의 조각을 엮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공예를 전공하고, 지금까지 작업을 하며 이어온 삶의 궤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지난 3월 TDA 하우스에서 그의 책 출간을 기념하는 동명의 전시 또한 자리했다. ‘아르 드 비브르’는 프랑스어로 생활의 예술을 뜻한다. 삶의 단편들이 모여 예술이 된 다고 믿는, 작업의 결과만큼이나 그 과정을 중시하는 작가에게 걸맞은 단어다. “‘일상’을 키워드로 잡은 거예요. 일상 속에서 생긴 사소한 사건조차 예술로 만들고 싶은데, 그것을 제 방식으로 어떻게 풀면 좋을지 고민하다 ‘자연’이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예술과 가장 가까운 제 상태는 자연이라고 생각해요. 그 형태와 색감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무한한 상상력이 생기고요.” 자연 중에서도 특별히 조명한 것은 돌, 식물, 흙이다. 캠핑을 가거나 등산을 하며 직접 모아온 줄무늬 돌에서 착안한 컵받침은 차를 마시며 나누는 소통의 시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식물을 통해서는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법을 익혔다. 나무에 잎이 나고 열매가 처음 맺힌 순간부터, 그것이 말라가며 변화하는 색과 형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이를 작업으로 승화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누군가의 작업을 돈으로 살 수는 있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까지 생각한다면 사실 그 작품을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는 거죠.” 도자를 전공한 작가는 흙을 빚는 시간 동안 이 자연이 낳은 부산물과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그는 현재 도자를 빚는다는 생각으로 펠트 작업을 하고 있다.

돌, 곤충, 식물 등 자연 요소는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2층에서 내려다본 전시장 풍경. 책 속 작품들이 실제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미소 짓는 이지영 작가.

이지영 작가는 ≪아르 드 비브르 Art de Vivre≫를 통해 자신의 서랍을 열고, 차곡차곡 모아온 보물을 기꺼이 타인과 공유한다. 자신의 작품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과정은 그가 작업을 완결하는 최종 단계이자 목적과 같기 때문이다. 책에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작업 도구를 촬영한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앤티크한 화구 박스가 눈길을 끌었다. 출처를 묻자 파리의 한 빈티지 마켓에서 샀다고 했다. “저는 한 인물이 작업에 쏟아낸 모든 시간과 철학을 보여주는 건 작품보다 도구라고 생각해요. 빈티지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도구를 살 때 누군가의 흔적과 세월을 사는 거죠.” 박쥐 형태의 펠트 반짇고리에도 사연이 있었다. “계속 해서 자연을 들여다보게 되니, 멸종위기 종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아끼는 수밖에 없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소소하게나마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어요.” 평소 박쥐를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해온 작가인 만큼, 반짇고리라는 오브제를 통해 일상의 삶이 예술과 융합되기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작업 도구가 작품이 되고, 작품이 작업도구가 되는 것. ‘아르 드 비브르’는 책 이름인 동시에 이지영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인 것이다.

말린 과일 열매가 펠트를 통해 따뜻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파리의 빈티지 마켓에서 구매한 화구 박스엔 누군가의 정든 손길이 묻어 있다.

펠트로 만든 ‘도자 용기’ 안에 실이 보관되어 있다.

멸종위기 종인 박쥐를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 이지영 작가.

오랫동안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해 탐구해왔다는 이지영 작가. 그 답은 결국 그가 지금까지 작업해온 것에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 다 해답이에요. 그걸 몸은 느끼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모르고 있었어요.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일하려면 계속해서 무언가를 들여다봐야만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알게 된 거죠. 결국 우리는 처절하게 무언가의 본질 자체를 들여다볼수록 나를 찾게 돼요. 뚜렷한 희망도 찾았다. ‘목표’가 아닌 ‘희망’이라 재차 강조한 그였다. “저는 결국 행복을 나눠주는 역할을 할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제가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거예요. 돌 작업을 하면서 시작되는 어떤 정이나, 마지막에 실을 감는 행위 자체도 저는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이 단편들이 모여서 인생이 되는 거고, 저는 펠트라는 소재를 통해 이를 따뜻하게 엮어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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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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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이어진 대화

흙으로 이어진 대화

흙으로 이어진 대화

전통 도자의 맥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김호정 작가. ‘살롱 설화수’ 클래스에서 그 미감의 언어를 들어보았다.

동양적 미감과 다채로운 컬러가 돋보이는 김호정 작가의 작품.

설화수 기프트를 위해 작업한 컵이 겹겹이 쌓여 있다.

흙과 안료 조합을 통해 다양한 컬러를 시도하고 있는 김호정 작가. 설화수와의 협업에서는 브랜드 시그니처 컬러인 얼시 앰버 컬러를 완성했다.

작업 도구들.

SPECIAL GIFT
김호정 작가에게 증정한 설화수의 진설크림 리치는 진설 리버스 에이징 기술을 통해 얼굴에 바르는 순간 피부 깊숙이 작용해 외부 자극으로 쌓인 피부 노폐물을 관리하고 노화로 인해 무너진 피부 각도를 바르게 세워준다. 60mL 52만원.

김호정 작가.

다양한 형태의 작품과 스케치를 볼 수 있는 작업실 전경.

도자는 오랜 시간과 손끝의 감각이 켜켜이 쌓여 완성되는 예술이다. 물성을 다루는 일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는 시대의 문화와 미감, 작가의 시선이 함께 녹아든다. 김호정 작가는 흙이라는 재료를 통해 전통의 흐름을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업은 조형을 넘어 고대 유물과 한국적 미감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결을 시각화한다. 복원이 아닌 흙이 품고 있는 시간성을 자신만의 색으로, 패턴으로 새롭게 번역해내는 것이다. 2016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접한 영국
왕립예술학교 학생들의 과제전은 그의 작업 세계를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고대 유물을 각자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전시를 보며 ‘도자를 계속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는 그 안에서 작업의 이유와 방향성을 다시 찾았다. 그때부터 ‘흙’이라는 재료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달라졌다. 초기에는 도자기의 구조적 물성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도자기가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문명이 도자기를 통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에 관심 갖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 중 ‘플로우 Flow’ 시리즈는 BC 2500년경 사이프러스의 고대 저그에서 시작되었다. 적갈색 테라코타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는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와 닮아 있었고, 이 ‘닮음’은 작가로 하여금 정체성의 근원을 되짚게 했다. 이후 달항아리 작업으로 확장된 시리즈는 흙의 성질과 인간의 삶, 그 사이를 흐르는 시간을 시각적으로 담아냈다. “하늘의 움직임이나 바다의 흐름 같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 도자 작업 안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패턴이 닮아 있다고 느꼈어요.” 작가는 물레 위에서 생성되는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을 기록하듯, 평면 드로잉 작업도 병행해왔다. 초기에는 도자 작업의 기록을 위한 드로잉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체도 하나의 작업 언어가 되었다. 물성을 회화적으로 풀어낸 이 작업은 독일과 프랑스 등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고, 첫 개인전 역시 평면 드로잉 작업이었다. 김호정 작가의 작업은 늘 확장 중이다. 다양한 흙을 섞어 땅의 색을 구현한 ‘얼시 Earthy’ 시리즈, 우주를 담은 ‘블랙 Black’ 시리즈 등은 특정 지역과 개념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는 늘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과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상상이 공존한다. 최근 설화수와 협업을 통해 선보인 ‘얼시 앰버 Earthy Amber’ 컬러 역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색으로 풀어내며 그 경계를 더욱 확장하고 있다.

북촌 설화수의 집에서 진행된 ‘살롱 설화수’ 클래스 전경. 아티스트와의 대담을 통해 작가의 작업 세계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 협업을 위해 선보인 ‘플로우 앰버 Flow Amber’ 와 ‘앰버 문 Amber Moon’ 시리즈. 작업 노트와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는 작업 도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연리문 기법을 활용한 그릇을 만들어보는 클래스가 진행되었다. 김호정 작가의 시연 후 참여자들은 직접 흙과 색을 조합해 자신만의 그릇을 만들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함께 만날 수 있는 북촌 설화수의 집.

아티스트와 대담하며 즐긴 정갈한 다과. 이번 협업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앰버 컬러와 도트 패턴이 돋보였다.

클래스를 통해 확장되는 미감의 언어
지난 4월 북촌 설화수의 집에서 김호정 작가의 도자 클래스가 열렸다. 김 작가와 설화수의 인연은 브랜드의 ‘설화수 기프트’ 협업을 통해 비롯되었다. 흙의 물성과 조형성을 중심에 두고 작업해온 작가의 시선은 ‘시간이 축적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설화수의 철학과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이후 그는 브랜드의 시그니처 컬러인 얼시 앰버에 영감을 받아 도자 오브제를 제작했고, 이 협업은 브랜드가 운영하는 문화 플랫폼 ‘살롱 설화수’로 확장되었다. 설화수가 운영하는 살롱 설화수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작가들의 감각을 통해 브랜드의 미학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전통 도자의 맥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조형성과 실용성을 아우르는 작업 세계관을 가진 김호정 작가가 살롱 설화수의 세 번째 협업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이번 클래스는 도자 만들기 체험을 넘어, 도자의 역사와 물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나누는 자리였다. 클래스는 ‘연리문’ 기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서로 다른 색의 흙을 섞어 자연스러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방식인데, 작가는 이를 통해 색과 문양이 이야기를 전달함을 보여주었다. 유물 속 기하학적 문양이 담고 있는 고대의 상징처럼, 그는 색의 배합을 통해 자신만의 현대적 해석을 끌어냈다. 김 작가는 도자 작업이 시각적 완성에 그치지 않기 바란다. 오브제의 촉감, 흙의 무게감, 작업 과정에서 퍼지는 흙내음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가 작품의 일부가 되기 기대한다. 클래스 역시 단순 체험이 아닌 흙을 만지는 감각, 색을 섞는 감정, 문양을 새기는 집중의 시간이 어우러지는 공감각적 경험으로 기획됐다. 그가 이번 클래스에 참여한 이유는 협업이나 브랜드 홍보와는 거리가 있다. ‘작가로서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학생 시절부터 이어져왔다. 복지관에서 장애인 대상 도자 수업을 진행하고, 현재 학교에서 강의를 이어가는 것 모두 그 연장선이다. 이번 살롱 설화수 클래스 역시 도자를 좀 더 대중적으로 알리고, 흙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장으로 여겼다.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었어요.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커뮤니티 안에서 작업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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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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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가 건네는 이야기

수저가 건네는 이야기

수저가 건네는 이야기

감도 높은 분위기와 공예적인 감성으로 충만한 ‘호랑’의 쇼룸에서 만나는 커트러리.

박홍구 작가의 작품을 전면에 설치한 호랑의 카운터. 뒤쪽의 선반장은 외부에서 바라본 창호문처럼 연출해 입체감을 더했다.

호랑을 운영하고 있는 배용희 대표. 한국과 일본의 감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을 직접 기획했다.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닥에 둔 돌. 일본에서 공부한 배용희 대표가 적용한 경험적인 요소다.

커트러리 중 반응이 가장 좋은 블랙 컬렉션.

서울 서촌에 오픈한 호랑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동안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운영했던 배용희 대표가 2020년부터 전개해온 브랜드이자 커트러리 등 주방용품을 선보일 쇼룸이다. 호랑은 외국어가 아니면서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발음하기 쉽고, 한국적인 동물인 호랑이를 생각하다 짓게된 이름이다. 지난 2월, 1965년에 지어진 한옥을 리모델링해 첫 오프라인 쇼룸을 열었다. 권혁율 목재 명장의 지휘 아래 기존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는 유지했고, 오랜 시간 붙어 있던 벽지나 신문지 등 종이의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배용희 대표는 “공사하면서 발견된 부분을 살리고 싶었다. 기둥에 붙은 신문지조차도. 이전 주인은 가벽 때문에 기둥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바닥도 한옥에서 가져온 고재를 사용해 전통 ‘우물 정’ 자 방식으로 끼우고 맞췄다. 최대한 본래 한옥의 모습을 갖추기 바랐다”며 리모델링 과정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1960년대 지어진 한옥 구조를 대부분 살려서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바닥도 전통 우물 정 자 방식으로 깔아 본래 한옥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쇼룸을 채우고 있는 가구는 스탠다드에이에서 제작했다. 서랍을 열면 태블릿을 통해 제품 정보와 가격을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의 커트러리는 오랜 시간 수저를 만들어온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 한식부터 양식, 디저트까지 활용하기에 좋다.

기본 골조가 한옥이라면 내부 요소는 다양한 분야의 공예에 가깝다. 쇼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카운터 전면은 배용희 대표가 특히 좋아하는 박홍구 작가의 작품이다. 소나무의 탄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박홍구 작가의 작품은 호랑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인데,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과 감성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외부에서 바라본 한옥의 창호문을 닮은 선반장도 공간에 입체감을 더한다. 선반장에는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인 고 이자성 선생이 외발뜨기 방식으로 제작한 한지를 사용했는데, 선생의 유작이어서 의미가 깊다. 아래쪽 고리를 사용해 각도를 조절하며 열고 닫을 수 있고, 불빛이 닿으면 한지에 비치는 그림자가 서정적이다. 선반장을 비롯해 카운터의 가구 부분과 디스플레이 테이블은 모두 스탠다드에이에서 제작을 맡았다. 에보나이징 기법을 사용해 검은빛으로 완성한 가구들은 쇼룸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쇼케이스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카운터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면 한쪽 벽면에 바른 푸른빛의 벽지는 시간을 두고서야 바라보다 빠져든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전에 좋아한 작가이자 아트&사이언스, 프라마, 와코 등과 협업하며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 교토의 작가 카미소에 Kamisoe의 작품이다. 호랑의 쇼룸을 위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벽지는 정확히 7mm 간격으로 연결해야 하는 이시가키 공법으로 설치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교토의 종이 장인이 직접 방문했을 정도로 신경 쓴 부분이다. 벽지가 선사하는 섬세한 분위기 덕분에 앞에 놓인 실버와 블랙 컬러의 커트러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서촌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호랑.

입구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책갈피인 서산을 설치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일본 카미오세 작가의 벽지 작품과 사방탁자를 닮은 가구, 천장의 서까래가 어우러져 호랑만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호랑이 쇼룸에서 선보이는 첫 제품은 골드와 실버, 블랙과 매트의 네 가지 커트러리다. 배용희 대표는 국내에서 40년 이상 수저 제품을 만들어온 업체와 협업해 제품을 개발했다. “40년이면 인생의 거의 전부를 바쳐온 분들이에요. 예전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만드는 곳이 40군데 정도 있었는데 이제 국내에 네곳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장인들의 기술과 노하우가 이대로 묻혀가는 것이 아쉬웠어요. 편집숍을 운영하며 국내에서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수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죠. 그런 많은 생각 끝에 커트러리를 만들게 됐어요. 호랑의 커트러리는 이음새 없이 이어진 형태로, 끝부분이 바닥과 닿지 않아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어요. 디자인은 단순해 보이지만 하나의 수저를 만들기 위해서 30회 공정을 거쳐야 해요.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수입 제품도 많지만, 한 길만 걸어온 장인들의 손을 거친 작품인 거죠.” 배용희 대표가 소개한 호랑의 커트러리는 숟가락과 젓가락, 포크와 나이프까지 한식, 양식, 디저트에 필요한 종류를 두루 갖추고 있다. 진공 기법으로 만들어 손으로 들었을 때 가볍고 손가락을 탄탄하게 받쳐줘 누구나 편히 사용할 수 있다. 찬찬히 둘러본 후 구입한 커트러리는 정갈한 종이박스에 담겨 포장된다. 원한다면 15분 정도 걸리는 각인 서비스를 받거나 선물하기 위한 보자기 포장을 선택할 수 있다. 포장하는 동안 쇼룸 곳곳에 놓인 한국 고미술품과 공예 작품을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10평 남짓한 쇼룸이지만 찬찬히 보고 있으면 이곳이 한옥 형태의 갤러리인지 혹은 교토의 어느 숍인지, 아득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디자인으로 일상을 위한 조각을 만들고 싶다는 호랑의 바람처럼 누구든 이곳에 오면 공간의 한 조각이 되어 스며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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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FREELANCE EDITOR

신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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