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도 높은 분위기와 공예적인 감성으로 충만한 ‘호랑’의 쇼룸에서 만나는 커트러리.

박홍구 작가의 작품을 전면에 설치한 호랑의 카운터. 뒤쪽의 선반장은 외부에서 바라본 창호문처럼 연출해 입체감을 더했다.

호랑을 운영하고 있는 배용희 대표. 한국과 일본의 감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을 직접 기획했다.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닥에 둔 돌. 일본에서 공부한 배용희 대표가 적용한 경험적인 요소다.

커트러리 중 반응이 가장 좋은 블랙 컬렉션.
서울 서촌에 오픈한 호랑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동안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운영했던 배용희 대표가 2020년부터 전개해온 브랜드이자 커트러리 등 주방용품을 선보일 쇼룸이다. 호랑은 외국어가 아니면서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발음하기 쉽고, 한국적인 동물인 호랑이를 생각하다 짓게된 이름이다. 지난 2월, 1965년에 지어진 한옥을 리모델링해 첫 오프라인 쇼룸을 열었다. 권혁율 목재 명장의 지휘 아래 기존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는 유지했고, 오랜 시간 붙어 있던 벽지나 신문지 등 종이의 흔적도 그대로 두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배용희 대표는 “공사하면서 발견된 부분을 살리고 싶었다. 기둥에 붙은 신문지조차도. 이전 주인은 가벽 때문에 기둥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바닥도 한옥에서 가져온 고재를 사용해 전통 ‘우물 정’ 자 방식으로 끼우고 맞췄다. 최대한 본래 한옥의 모습을 갖추기 바랐다”며 리모델링 과정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1960년대 지어진 한옥 구조를 대부분 살려서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바닥도 전통 우물 정 자 방식으로 깔아 본래 한옥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쇼룸을 채우고 있는 가구는 스탠다드에이에서 제작했다. 서랍을 열면 태블릿을 통해 제품 정보와 가격을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의 커트러리는 오랜 시간 수저를 만들어온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 한식부터 양식, 디저트까지 활용하기에 좋다.
기본 골조가 한옥이라면 내부 요소는 다양한 분야의 공예에 가깝다. 쇼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카운터 전면은 배용희 대표가 특히 좋아하는 박홍구 작가의 작품이다. 소나무의 탄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박홍구 작가의 작품은 호랑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인데,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과 감성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외부에서 바라본 한옥의 창호문을 닮은 선반장도 공간에 입체감을 더한다. 선반장에는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인 고 이자성 선생이 외발뜨기 방식으로 제작한 한지를 사용했는데, 선생의 유작이어서 의미가 깊다. 아래쪽 고리를 사용해 각도를 조절하며 열고 닫을 수 있고, 불빛이 닿으면 한지에 비치는 그림자가 서정적이다. 선반장을 비롯해 카운터의 가구 부분과 디스플레이 테이블은 모두 스탠다드에이에서 제작을 맡았다. 에보나이징 기법을 사용해 검은빛으로 완성한 가구들은 쇼룸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쇼케이스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카운터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면 한쪽 벽면에 바른 푸른빛의 벽지는 시간을 두고서야 바라보다 빠져든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전에 좋아한 작가이자 아트&사이언스, 프라마, 와코 등과 협업하며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 교토의 작가 카미소에 Kamisoe의 작품이다. 호랑의 쇼룸을 위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벽지는 정확히 7mm 간격으로 연결해야 하는 이시가키 공법으로 설치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교토의 종이 장인이 직접 방문했을 정도로 신경 쓴 부분이다. 벽지가 선사하는 섬세한 분위기 덕분에 앞에 놓인 실버와 블랙 컬러의 커트러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서촌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호랑.

입구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책갈피인 서산을 설치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일본 카미오세 작가의 벽지 작품과 사방탁자를 닮은 가구, 천장의 서까래가 어우러져 호랑만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호랑이 쇼룸에서 선보이는 첫 제품은 골드와 실버, 블랙과 매트의 네 가지 커트러리다. 배용희 대표는 국내에서 40년 이상 수저 제품을 만들어온 업체와 협업해 제품을 개발했다. “40년이면 인생의 거의 전부를 바쳐온 분들이에요. 예전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만드는 곳이 40군데 정도 있었는데 이제 국내에 네곳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장인들의 기술과 노하우가 이대로 묻혀가는 것이 아쉬웠어요. 편집숍을 운영하며 국내에서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수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죠. 그런 많은 생각 끝에 커트러리를 만들게 됐어요. 호랑의 커트러리는 이음새 없이 이어진 형태로, 끝부분이 바닥과 닿지 않아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어요. 디자인은 단순해 보이지만 하나의 수저를 만들기 위해서 30회 공정을 거쳐야 해요.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수입 제품도 많지만, 한 길만 걸어온 장인들의 손을 거친 작품인 거죠.” 배용희 대표가 소개한 호랑의 커트러리는 숟가락과 젓가락, 포크와 나이프까지 한식, 양식, 디저트에 필요한 종류를 두루 갖추고 있다. 진공 기법으로 만들어 손으로 들었을 때 가볍고 손가락을 탄탄하게 받쳐줘 누구나 편히 사용할 수 있다. 찬찬히 둘러본 후 구입한 커트러리는 정갈한 종이박스에 담겨 포장된다. 원한다면 15분 정도 걸리는 각인 서비스를 받거나 선물하기 위한 보자기 포장을 선택할 수 있다. 포장하는 동안 쇼룸 곳곳에 놓인 한국 고미술품과 공예 작품을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10평 남짓한 쇼룸이지만 찬찬히 보고 있으면 이곳이 한옥 형태의 갤러리인지 혹은 교토의 어느 숍인지, 아득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디자인으로 일상을 위한 조각을 만들고 싶다는 호랑의 바람처럼 누구든 이곳에 오면 공간의 한 조각이 되어 스며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