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1회를 맞은 런던 크래프트 위크는 지난 10년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단단해져서 돌아왔다.
세계 최대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가 메인 스폰서로 참여하며,
규모와 수준이 한 단계 도약한 현장을 직접 다녀왔다.

애쉬 & 플럼 Ash & Plumb이 뉴 크래프트메이커 The New Craftmaker를 위해 독점 제작한 패티네이트 오크 용기. © Ash & Plumb × The New Craftmaker
공예와 디자인,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축제인 런던 크래프트 위크 London Craft Week(이하 LCW)가 지난 5월 12일부터 18일까지 열렸다. 런던 전역에서 400여 개의 전시, 마스터클래스, 시연이 펼쳐졌으며, 세계 각국에서 온 1000여명의 장인과 디자이너가 참가해 런던이 유럽 공예의 중심지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V&A박물관,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 주요 랜드마크는 물론 평소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퓨터러스 홀, 아이언몽거스 홀 같은 전통 수공예 장인의 길드 공간도 개방됐다. 또한 행사 기간에 맞춰 소실위기에 처한 영국의 전통 기술을 등재한 ‘헤리티지 레드 리스트 Heritage Red List’를 발표하면서, 디자인 축제를 넘어 공예의 가치를 환기시키는 의미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두 번째로 개최된 시크릿 세라믹스. 유명 작가와 신진 작가가 익명으로 작품을 출품해 구매 후에만 작가의 이름을 알 수 있다.
Secret Ceramics
유서 깊은 영국 미술 경매 회사 크리스티 Christie’s에서 열린 ‘시크릿 세라믹스’은 유명 및 신진 도예가 100명의 작품을 익명으로 출품해 동일한 가격에 판매하는 흥미로운 기획이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에드먼드 드 왈 Edmund de Waal, 2024 로에베 재단 공예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앤 반 후이 Ann Van Hoey,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일본 작가 히토미 호소노 Hitomi Hosono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알아보는 안목만 있다면,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판매 수익금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영국 청소년들이 도자기 공예를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자선단체 파이어드업4 FiredUp4에 기부된다. 또한 평소 접하기 힘든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도 LCW 기간에 대중에게 공개되며, 온라인 옥션도 함께 진행된다.

잼에서 도자기 화병 작업을 선보인 이사투 하이드 작가. © Dan Weill Photography

하우에서 공개한 앤티크 가구와 새로운 트림블 프린트.

상쾌한 그린 컬러가 돋보이는 오우커의 마레아 조명.
Pimlico Road
첼시와 빅토리아 사이에 위치한 핌리코 로드는 런던에서 가장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앤티크, 디자인 숍이 모여 있는 거리다. 하이엔드 매장뿐 아니라 영국 수공예 전통과 현대 디자인이 공존하는 ‘Made in Britain’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영국 빈티지의 상징과 같은 하우 Howe는 LCW 기간에 새로운 ‘트림블 프린트’를 공개했고, 시빌 콜팩스 & 존 파울러 Sibyl Colefax & John Fowler는 고급 원목 마카사르 에보니로 제작하는 ‘Cockpen’ 테이블의 제작 과정을 오픈 스튜디오 형식으로 선보였다. 잼 Jamb은 도예가 이사투 하이드 Isatu Hyde의 18세기 도자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리즈를, 오우커 Ochre는 무라노 전통 유리공예로 제작한 새로운 조명 컬렉션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까르띠에 등 럭셔리 브랜드들이 보인 슬론 스트리트에도 공예 행사가 펼쳐졌다. © Hufton+Crow

셀레리아 핸드 스티치를 시연한 펜디.

카푸신 백 제작 과정을 선보인 루이 비통.
Sloane Street
럭셔리 브랜드가 모인 슬론 스트리트에서는 루이 비통, 구찌, 펜디, 보테가 베네타, 페라가모 등 전통과 장인정신을 중요시하는 브랜드들이 각자의 특별한 공예 기술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구찌는 1950년대부터 이어온 ‘풀라르’를 중심으로 실크 공예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토크를 열었고, 펜디는 이탈리아 장인이 ‘셀레리아’ 핸드스티치를 직접 시연했다. 루이 비통은 방돔 아틀리에의 장인이 참여해 250단계에 달하는 ‘카푸신’ 백의 제작 과정을 현장에서 선보였다. 브랜드 철학과 공예의 가치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데이비드 호란의 작품을 선보인 베통 브루트.

세바스찬 콕스 스튜디오와 낫 막스가 협업한 타이드 컬렉션.

카탈리나 스윈번의 전시를 선보인 몰테니앤씨. 종이를 매체로 역사적 문화와 상징적 텍스트를 조형적으로 풀어냈다.

에브 & 플로가 선보인 카티 테이블.

우드 베니어 조각을 활용한 브로디 네일의 우드스트로크 컬렉션.
No.9 Cork Street
프리즈 런던의 상설 갤러리이자 전 세계 갤러리들의 전시 플랫폼인 No.9 코르크 스트리트도 올해 처음으로 LCW에 참여했다. 호주 출신 디자이너 브로디 네일 Brodie Neill은 산업 폐기물 베니어 조각을 활용한 ‘우드스트로크 Woodstroke’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추상표현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목재를 회화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로 풀어냈다. 디자인 갤러리 베통 브루트 Béton Brut는 <Forge to Fold: Hands at Work from Iron to Paper> 전시에서 데이비드 호란 David Horan의 종이 가구 컬렉션을 소개했다. 프랑스의 데쿠파주 기법과 일본 민예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키슈 와시 등 일본 전통 종이를 활용해 ‘비건 벨럼’ 시리즈와 ‘드래곤 스킨’ 시리즈를 제작했다. 유리와 금속의 이질적 조합을 통해 자연의 흐름을 표현한 ‘에브 & 플로 Ebb & Flow’는 무라노의 얄리 글라스 Yali Glass와 일본 키타웍스 Kitaworks가 협업한 ‘카티 Kati’ 테이블을 선보였다. 스위스 엥가딘의 빙하와 베네치아 석호에서 영감받은 유기적 디자인이 특징이다. 영국 디자인계의 권위 있는 칭호인 RDI에 선정된 세바스찬 콕스 Sebastian Cox 스튜디오는 마블링 아티스트 낫막스 Nat Maks와 함께 ‘TIDE’ 컬렉션을 선보였다. 영국산 단풍나무 테이블에 일몰과 바다에서 영감을 받은 색조의 마블링이 더해졌다.

이천 도자기 명장 한도현의 청자.

편예린 작가의 ‘Poem for Ephemeral Moments’.

유리와 옻칠의 조화가 독창적인 이규홍 작가. © Charles Burnand Gallery

V&A 뮤지엄에서 말총 엮기 기술을 시연한 정다혜 작가.

김대성 장인이 만든 합죽선. © Korea Heritage Agency

찰스 버나드 갤러리에서 선보인 김희찬의 작품.
Korean Craft in LCW
이번 LCW에서는 한국의 활약이 돋보였다. 처음 참가한 국가유산청(국가유산진흥원)은 ‘Object of Beautification: 한국의 장신구’를 주제로,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와 현대 디자이너가 협업한 공예품을 K.Craft라는 브랜드로 선보였다. 조각장, 입사장, 금박장, 누비장 등 전통 기술과 실용적 디자인이 만나는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 전승 공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 컬렉션 Han Collection에서는 이천시가 선정한 6개 공방의 작품 15점이 전시되었다. 뉴욕 MOMA 최초의 한국 작가 김대성, 2024 대한민국분청공모전 은상 수상자 나용환, 도자기 명장 한도현, 도자와 회화를 결합한 김현종, 백자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이우진, 분청사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김상기 등이 참여했다. 찰스 버나드 갤러리 Charles Burnand Gallery에서는 목재로 유기적 조형을 만드는 김희찬, 금속 세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김계옥의 작품이 소개됐다. 두 작가 모두 로에베 재단 공예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출신이다. 가장 주목받은 전시는 더 레이버리 The Lavery에서 열린 솔루나 파인 크래프트의 <Landscape of Materials: 재료의 풍경>. 인터내셔널 파빌리온 중 한국관으로 참여해 현대 공예의 조형성과 재료 탐구를 깊이 있게 보여주며, LCW 관계자와 많은 관람객의 호평을 받았다. 사라져가는 말총 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정다혜, 금속 위에 옻칠을 입힌 천우선, 자연석 질감을 도자로 표현한 편예린, 빛을 끌어들이는 유리 공예의 이규홍, 개인의 서사를 담은 최기용까지 총 5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재료와 감각으로 한국 공예의 현재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