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힐링의 가치를 담아 탄생한 공간, 페즈. 한남동 골목에 자리한 곳으로서
자연, 문화, 공동체가 공존하는 ‘최소 단위의 도시’를 지향하며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해가고 있다.
지난해 말, 한남동의 한 구석진 골목에 4층 규모의 새로운 커뮤니티 몰이 문을 열었다. 벽돌과 나무라는 건축적 소재의 특징이 어우러진 이곳에는 간판도, 별도의 안내문도 없다. 하지만 취향이 있는 이들의 아지트가 대개 그렇듯 오직 입소문만으로, 어느 순간부터 주민 중심의 커뮤니티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상업 공간과는 다른, ‘커뮤니티 몰’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는 페즈 FezH의 임종현 대표를 만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페즈라는 공간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불안과 고립감을 벗어날 방법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요가나 운동을 하고, 명상 책을 읽고 제주도의 오름,
해변, 숲 등 자연을 매일 찾아다니며 마음을 다스렸죠. 그 뒤 코로나19가 어느정도 수그러들자, ‘나만의 공간’이 더 소중해졌어요. 자연이 아닌 도심, 특히 서울에서도 그런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죠. 발리에서 경험한 보헤미안 분위기, 자유스러움, 혼자서도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졌고, 이것이 페즈에 대해 생각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갤러리형 매장, 음악&도서 라이브러리, 카페, 바, 리트릿 스페이스 등 여러 공간이 한 건물에 있는 만큼 동선이나 구조 등 고려할 요소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페즈는 탐험과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미로처럼 이어진 구조,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모호한 계단,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갤러리 공간 등. 지하 광장부터 최상단의 리트릿 스페이스까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소용돌이 같은 동선을 따라야 합니다. 그 덕분에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지루하지 않아요. 건물내부의 수직·수평적 동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공간의 접점마다 또 다른 곳을 마주하게 됩니다. 유이화 건축가는 독특한 동선을 통해 방문객이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는 여정을 보내기 바랐어요. 호기심에 이끌려 광장을 찾은 사람들은 마치 오래된 도시의 골목을 탐험하듯 각 공간을 경험하면서 정신적 고요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페즈의 광장.

나무, 유리, 금속의 소재가 어우러졌다.

미로같이 설계된 계단.

페즈의 바 블루캣.

블루캣에서 가끔 디제잉을 한다는 임종현 대표.
특히 벽돌과 나무의 소재가 곳곳에 어우러진 것이 인상적입니다. 공간을 설계한 유이화 건축가가 중요하게 고려한 사항 중 하나는 한남동 골목길에서 느껴지는 친숙함과 편안함을 공간에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벽돌은 시간이 만든 흔적을 상징하고, 따뜻한 색감과 질감을 통해 페즈를 더욱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주어요. 또 오래된 골목길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벽돌 자체가 가진 흙의 질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국내 벽돌 공장에서 몇 번의 실험 끝에 지금의 질감과 컬러감을 이끌어냈어요. 또 다른 주 재료인 나무는 부드럽고 따뜻한 표면감과 자연스러운 질감을 더합니다. 표면은 탄화시켜서 나무 자체의 깊이감을 주는 동시에 나무색이 변하는 시간은 조금 천천히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골목을 탐험하며 발견하는 재료의 다양성과 따뜻함은 페즈가 한남동의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돕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 밖에 공간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디테일은 무엇인가요? 광장 계단에 앉아 있으면 시냇물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원 같은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건축가 출신의 한원석 작가에게 ‘사운드 포레스트’ 작품을 의뢰했으며, 작품명은 ‘노르웨이의 숲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 입니다.

탁 트인 페즈의 내부.

요가 수업을 진행하고 차를 마실 수 있는 리트릿 공간.
페즈에 대한 모티브는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건축적 모티브와 스토리라인은 모로코의 페즈 올드시티 Fes El Bali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승효상 건축가에 의하면 도시 페즈는 열 채의 집이 하나의 단위로 묶여 공동의 빵집과 우물을 공유하는 ‘최소 단위의 도시’인데, 이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공간 페즈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커뮤니티의 필수 요소를 한 곳에 모은 최소 단위의 도시가 되고자 했죠. 광장, 갤러리형 매장, 음악&도서 라이브러리, 리트릿 공간, 주말 마켓 등 다양한 공동 시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작은 도시를 이룹니다. 페즈의 이름 역시 모로코의 도시 페즈에 힐링과 한남동의 알파벳 H를 합성해 만들었어요.
커뮤니티 몰이라는 공간을 기획하며 참고한 해외 사례가 있나요? 하나를 꼽자면 태국 방콕의 ‘더 커먼스’예요. 그들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우리 의도는 먼저 커뮤니티를 구축한 다음, 쇼핑몰을 구축하는 것이다.” 공간 자체에 대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어떤 콘텐츠를 담아야 할지 방향성까지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공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건, 그 공간을 꾸준히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티 몰은 대형 쇼핑몰에 비해 규모는 작더라도 로컬 브랜드 영입과 다양한 행사 등을 통해 지역민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든다는 데에 의미가 있어요.
서울의 많은 지역 중 한남동 골목에 건물을 세우기로 결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대로변보다는 오히려 이야기가 있는 골목을 좋아하죠. 페즈가 있는 한남동에 대해 언급하자면, 굉장히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특성이 있어요. 이태원을 포함한 한남동 일대는 재벌, 외국인, 성소수자 등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그룹이 오랜 시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유지해온 포용의 도시예요. 커뮤니티가 형성된다면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재미있는 공간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픈한 지 아직 얼마 안 되었지만, 기억나는 방문객의 피드백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 오픈 행사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요. 처음 뵙는 중년 여성이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여쭤보니 동네에
20여 년을 살았는데, 주민 위한 공간을 오픈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페즈가 가진 의미를 알아봐주신 것 같아 뭉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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