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 Lauterbrunnen의 언덕 위로 바람이 분다. 살레 지붕을 스친 알프스의 순풍에는 정갈한 흙 냄새가 실려 있다. 초원 위 점점이 박힌 세모 가옥 사이를 붉은색 산악열차가 굽이쳐 오른다. 만년설을 등지고 초록의 알프스를 트래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롭고 아늑하다. 산악 마을 라우터브루넨, 그린델발트 Grindelwald에서는 ‘전원일기’의 한 장면을 채우는 꿈의 산책이 현실이 된다.

스위스의 산악마을에서는 세모 지붕 사이로 바람이 숨을 고른다. 초록이 짙은 알프스 그린델발트의 전경 ⒸMaisonkorea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붉은색 산악열차는 왠지 도발적이다. 알프스의 비밀의 화원 ‘쉬니케 플라테’로 오르는 열차. ⒸMaisonkorea

알프스의 둔덕에는 젖소들이 거닐며 ‘전원일기’의 한 장면을 장식한다. ⒸMaisonkorea
스위스 알프스는 현명한 사람들과 가깝다. 히말라야처럼 꿈속에서만 동경하는 ‘먼 산’이 아니다. 정상을 향해 무작정 도전하는 어리석음만 피하면 산악마을의 낭만에 빠져들 수 있다. 눈이 녹아내린 푸른 땅에서는 ‘완급의 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트레킹과 산악열차로 소통을 한다. 스위스 알프스 중 가장 빼어난 지역이 중부 베르너 오버란트 알프스 지역이다. 이곳에는 4000m 이상의 고봉들이 30여 개나 모여 있다. 라우터브루넨, 그린델발트, 뮈렌 Murren, 벵겐 Wengen 등은 해발 1000~2000m 사이에 옹기종기 위치한 산악마을들이다. 젖소의 흔적이 가득했던 옛 마을들은 산악 액티비티의 아지트로 변신하기도 했고, 전기 자동차만 다니는 청정 지역으로 남기도 했다.
청정 마을에서 받은 엽서 한 장

알레취 빙하가 흘러내린 계곡에 위치한 라우터브루넨은 고요한 ‘엽서 한 장’의 마을이다. ⒸMaisonkorea
감동에도 파장이 있다면 라우터브루넨의 첫 조우는 분명 이질적이다. 캠핑장 한켠에서 들이켠 이곳 전통맥주 루겐브로이만큼이나 추억은 짜릿하고 또렷하다. 만년설로 뒤덮인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밤새 별빛을 받아내고, 점퍼를 벗으면 도시의 탁한 냄새 대신 향기로운 흙 향기가 진하게 배어난다. 한낮의 라우터브루넨은 엽서 한 장으로 다가선다. 샬레 가옥에 머물며 창문을 열면 초록빛 엽서가 방 안으로 날아든다. 괴테가 시의 영감을 얻었다는 슈타우바흐 폭포는 300m 높이의 포말을 자랑하고 멀리 교회당에서는 종소리가 흩어진다. 그 평화로운 마을에 알레취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소리와 새소리가 내려앉고, 젖소들의 커다란 방울 소리가 채워진다. 굳이 문 밖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이 세상 가장 평화로운 엽서 한 장을이 계곡마을에서 받아볼 수 있다.

무공해 마을인 벵겐을 오가는 노란색 열차. ⒸMaisonkorea
라우터브루넨에서 노란색 산악열차를 타고 이동하면 벵겐으로 이어지고 곤돌라를 타고 오르면 뮈렌으로 연결된다. 두 곳 모두 전기 자동차만 다니는 청정마을이다. 해발 1275m에 위치한 벵겐에서는 앙증맞은 초록색 트럭이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데 소음도, 먼지도 없다.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와 치즈가게에서 나지막하게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만이 골목에 맴돈다. 마을 아래로는 라우터브루넨 계곡이 펼쳐지고 위로는 멘리헨 봉우리가 병풍처럼 서 있다. 산악마을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곳은 바로 뮈렌이다. 1639m에 자리 잡은 마을은 지대가 높아 베르너 오버란트의 3대 봉우리인 아이거, 융푸라우, 묀히를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100년이 넘은 고풍스런 가옥들은 미로 같은 골목에 낮게 웅크린 채 흩어져 있다. 지붕에는 집이 만들어진 연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창문 위는 방울과 산양 머리뼈로 장식 됐다. 아기자기한 골목들에는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인적 뜸한 바들이 숨어 있다. 뮈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루를 성스럽게 보내려는 신혼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런 한적한 산악마을에서의 휴식은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베르너 오버란트 지역이 매력 넘치는 것은 산악마을들이 무공해 교통수단과 함께 숱한 트레킹 코스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거친 숨으로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높은 곳에서 발걸음을 시작해 산 아래를 감상하며 내려설 수 있다. 알프스의 ‘흙’을 밟고 ‘향기’를 맡는 상상 밖의 일들이 이곳에서는 이렇듯 편리하게 진행된다. 이 일대에 만 70여 개, 총 200km의 다양한 트레킹 루트가 있는데 능선과 능선을 잇는 코스는 꼬박 한나절이 걸리기도 한다.

설산을 배경으로 알프스 전통악기인 알펜호른을 연주하는 주민들. ⒸMaisonkorea

융프라우요흐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인 클라이네샤이덱역. ⒸMaisonkorea

붉은색 열차는 산악마을의 소통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다. ⒸMaisonkorea

스위스 전통놀이인 깃발 던지기. ⒸMaisonkorea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산악 자전거를 즐기는 청춘들. ⒸMaisonkorea

깎아자른 아이거 북벽은 여러 산악 영화의 배경이 됐다. ⒸMaisonkorea

피르스트에서 내려오는 길에 체험하는 트로피 바이크. ⒸMaisonkorea

인터라켄 인근의 브리엔츠 호수. ⒸMaisonkorea

괴테가 시의 영감을 얻었다는 슈타우바흐 폭포. ⒸMaisonkorea
데칼코마니의 풍경, 바흐알프제 호수

데칼코마니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바흐알프제 호수. 스위스 책자에 단골로 등장한다. ⒸMaisonkorea
여름이 오면 라우터브루넨의 동쪽 마을인 그린델발트의 호흡이 짙어진다. 라우터브루넨이 고요하다면 산악 액티비티의 아지트인 그린델발트는 한껏 들떠 있다. 트레킹 시즌에는 거리의 상가들은 자정까지 문을 열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이방인들이 어우러져 마을이 흥청거린다. 그린델발트에서 즐기는 최고의 트레킹은 피르스트(First)에서 체험할 수 있다. 해발 2168m의 피르스트역에서 바흐알프제 호수(Bachalpsee)까지 이르는 코스는 평이하고 아기자기해 가족 단위로 걷기에 좋다. 이곳에는 산악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하이킹족도 만날 수 있다. 그린델바트에서 피르스트로 향하는 곤돌라를 타면 농익은 계절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통 가옥들이 옹기종기 늘어선 가운데 산악열차들이 마을을 양곱창처럼 에워싸며 고즈넉하게 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산 아래에서 봉우리로 시선을 옮기면 풍요로운 숲이 잡목으로 연결되었다가 눈 덮인 산으로 이어진다.

피르스트 정상에서 체험하는 패러글라이딩. 눈 덮인 봉우리 아래. 초록마을로 뛰어들게 된다. ⒸMaisonkorea
피르스트역의 ‘마운틴 로지’라는 산장은 이방인들의 쉼터다. 하루 묵을 수도 있고, 등산화도 빌릴 수 있으며 산장 앞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작고 아담한 교회당이지만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만으로는 이 세상에 피르스트역 옆에는 이 일대 최고의 패러글라이딩 출발 포인트가 자리 잡았다. 2000m 넘는 곳에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체험은 또 다른 묘미다. 라우터브루넨에서 맞았던 살가운 바람과는 다른 바람이 산자락 사이로 불어온다. 패러글라이더는 새가 되어 날고 그 새들은 점이 되어 알프스의 봉우리에 알알이 박힌다. 피르스트에서 시작되는 산행길은 낮고 가지런하다. 이곳은 낮은 평균기온 탓에 나무가 자라지 못해 키 작은 풀들이 동행이 된다. 바흐알프제 호수로 향하는 트레킹 코스에는 나무 기둥만이 듬성듬성 꽂혀 있는데 한겨울 눈이 쌓였을 때를 대비해 길을 표시하려고 꽂아놓은 것들이다. 2시간 남짓 계속된 트레킹은 바흐알프제 호수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쉼표를 찍는다.

피르스트에서 바흐알프제를 잇는 루트는 이 일대 트레킹의 백미로 꼽힌다. ⒸMaisonkorea
스위스 홍보책자에 단골로 등장하는 호수인 바흐알프제는 설산과 베르니즈 알프스의 봉우리가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듯 대칭을 이루며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산행객들은 갈 길을 멈추고 호수의 정경에 한동안 넋을 잃어 자리를 뜨지 못한다. 빙하가 녹아 형성된 이곳 호수는 푸르고 맑으나 물이 너무 차가워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피르스트 산행의 재밋거리는 하산길에도 숨어 있다. 중간역 보르트 등 작은 마을 단위에서는 전통축제가 열린다. 긴 뿔같이 생긴 전통악기인 호른을 연주하는 사람들과 꽃무늬 흰 모자를 쓴 알프스의 소녀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주민들은 대낮부터 치즈를 곁들인 화이트와인과 루겐브로이를 마시며 요들송을 부른다. 중간역에서 페달 없는 미니 바이크를 타고 꼬불꼬불 오솔길을 따라 마을을 달리면 야생화와 게으른 젓도르이 구식 슬라이드 화면처럼 긴 잔영을 남긴 채 스쳐지난다. 이 일대에서는 빙하 산책, 야생화 트래킹으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에서 묀히요흐 산장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빙하 위를 걷는 황홀한 추억을 선사한다.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재된 이곳 알레취 빙하는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로 22km의 길이를 자랑한다. 팥빙수처럼 사각거리는 2시간 가량의 빙하 트레킹을 즐긴 뒤 산장에 앉아 커다란 뚝배기 그릇에 담긴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호사스런 휴식이 가능하다. 빌더스빌 마을에서 100년 넘은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쉬니케 플라테(Schynige Plate)에 오르면 야생화를 보며 트레킹을 하는 코스도 마련돼 있다. 1893년 증기기관차로 운행을 시작한 이곳 산악열차는 고풍스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총 7.5km 구간을 운행하는데 출발역과 종착역의 고도차가 1400m나 된다. 쉬니게 플라테 정상의 알파인 가든은 1927년 알프스 최초로 만들어진 정원으로 이곳 산장에서는 석양의 야외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땅거미가 내리면 노천 바에 앉아 이곳 전통맥주인 루겐브로이 한잔을 들이켠다. 샬레 지붕을 스친 바람과 닮은 향긋한 공기가 목밑에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알프스 봉우리로 별이 쏟아지면 눈빛인지 별빛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행복한 노곤함.’ 이 모든 것이 지우지 못할 진한 감동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여름이 오는 길목에도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만년설을 품고 있다. ⒸMaisonkorea

인터라켄 하더 쿨룸 아래 펼쳐진 운해. ⒸMaisonkorea

산악마을의 관문이자 호수마을인 인터라켄의 전경. ⒸMaisonkorea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융프라우는 거친 풍모와 달리 ‘젊은 처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Maisonkorea

그린델발트로 향하는 하이킹 코스. ⒸMaisonkorea

청정마을 뮈렌의 한가로운 풍경. ⒸMaison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