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이 범람하면 개성 있는 집을 만나기 어려워진다. 북유럽 스타일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감각과 취향에 귀 기울인 집을 만났다. 평범함을 거부한 다섯 식구의 집이 먼 바다 끝에 반짝이는 등대의 불빛처럼 반가웠다.
↑ 빨간색 하이글로시 소재로 제작한 부엌 시스템. 집주인 이기임 씨는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지금 살고 있는 성북동 집을 만났다. “친정 식구들이 성북동에 살아서 저에겐 익숙한 동네지만 남편에겐 그렇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집은 남편이 저보다 더 반했죠. 뒤뜰에 있는 소담스러운 연못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라고요. 외관은 그대로 두었고 발코니 쪽으로 일부 공간을 확장했고 내부는 모두 고쳤어요. 부엌이 지하에 있었고 기본 마감도 예전에 유행하던 클래식 스타일이라 리뉴얼이 필요했죠.” 이기임 씨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친정엄마와 함께 원하는 공간을 스케치하고 디자인해서 공사만 맡겼다.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면서 약간의 하자도 발생했지만 그것마저도 좋은 경험이자 추억이 됐다. 현관문을 닫았을 때 보이는 동그란 선의 아름다움, 오후에 햇빛이 들어올 때 가장 예쁜 거실의 코너 등 그녀가 소개한 집 안의 숨은 매력은 집과 사람의 소통에서 비롯된 내밀한 것이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뤄진 이 집은 원래 곳곳에 방이 많았다. 아이를 셋이나 낳을 줄 몰랐기에 공사할 때 지하에 있던 방을 하나로 텄는데 지금 그 공간은 아들들의 차지다. 그 외에 2층의 부부 침실과 딸아이 방 정도가 방의 전부. 대신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거실과 부엌이 가족들의 중심 공간이 됐다. “딸아이만 방을 따로 주고 지하는 아들 둘을 위한 방으로 만들었어요. 잠도 자고 놀기도 하는 놀이터죠. 쿵쾅쿵쾅 뛰어다녀도 뭐라할 사람이 없어서 아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단독주택의 가장 좋은 점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다는 거죠.”
↑ 가에타노 페세의 칸나레조 소파와 장 누벨의 레스 테이블, 신지훈 작가의 나무 의자가 놓인 넓은 거실. 천장에 단 레일 조명이 멋스럽다. 겨울에는 벽난로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한다.
↑ 세라룽가의 로메오 아웃도어 벤치가 놓인 코너. 빨간색 부엌 시스템과 금색 벤치, 거울이 어우러져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세 아이의 엄마이다 보니 인테리어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하지만 이기임 씨는 예전부터 가구와 그림, 소품에 관심이 많았다.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콘솔은 서도호 작가의 초기작이며 거실에 둔 까시나의 칸나레조 소파와 한국 작가 신지훈의 나무 의자, 장 누벨의 레스 테이블 등은 대부분 이 집에 들어오면서 구입하거나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로 서로 덤덤하게 어우러져 있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강렬한 독창 같지만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합창으로 들리는 것은 9년의 시간이 부린 마법일까. 유기적인 곡선 디자인에서 탄력이 느껴지는 부스넬리의 파란색 플로코 체어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사토이의 동물 인형을 매치한 코너에서도 정해진 문법을 따르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지금은 없는 인터CK숍이나 예전에 논현동에 있던 비에쎄 매장에서 주로 가구나 조명을 샀어요. 아트 퍼니처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남들이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 것들에 저는 마음이 쏠리더라고요. 가구숍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았던 제품이 판매된다며 좋아할 정도였죠. 저는 독특하고 전형적이지 않은 디자인에 끌리는 것 같아요. 아웃도어 벤치나 조명을 일부러 실내에 두는 것도 좋아하고요.”
왼) 집주인이 애정을 갖고 있는 현관문. 동그란 창과 중문의 사각형 창문이 어우러진 모습을 좋아한다고. 오) 올록볼록한 다리가 특징인 콘솔은 서도호의 초기작. 벽 뒤로는 다이닝 공간이 있다.집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빨간색 주방이다. 주방 전체에 빨간색을 적용하기에는 모험이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작품처럼 근사하게 어울렸다. “저도 그전에는 무난한 흰색 주방을 선호했어요. 공사하면서 어떤 색상의 주방을 만들까 고민했는데 남편도 저도 빨간색이 어떠냐는 의견을 냈죠. 과감한 컬러이긴 하지만 천고가 높아 밋밋할 수 있는 공간에 포인트가 됐고 바닥에 깐 회색 데코 타일과도 어울려요.” 빨간색 주방과 입구에 둔 세라룽가의 금색 아웃도어 벤치, 나무 프레임의 거울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상 공간 같은 신선함을 준다.
↑ 아이들이 좋아하는 한사토이 인형과 경쾌한 곡선 디자인의 파란색 플로코 체어가 놓인 거실.
왼) 입구 쪽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딸아이 방과 부부 침실이 나온다. 오) 분홍색 패브릭으로 안쪽을 마감한 가에타노 페세의 아이 펠트리 체어를 둔 전망이 좋은 침실.
↑ 지하에 만든 아들 둘을 위한 방. 피아노도 치고 책도 보고 미술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다.
부엌 옆 계단을 올라가면 부부 침실과 딸아이의 방이 나온다. 부부 침실은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전망이 좋은 방이다.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를 조망할 수 있는 침실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침실에는 왕좌를 떠올리게 하는 가에타노 페세의 아이 펠트리 체어와 깔끔한 은색 프레임의 침대만 두었고 파우더룸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다락은 창고처럼 활용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지금은 어렵지만 원래 저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깔끔한 공간을 좋아해요. 포인트가 되는 가구나 조명 정도만 두고 가능한 한 간결하고 심플하게요. 그래서 침실만이라도 간소하게 꾸미고 싶었어요.” 초등학생인 아이들의 방은 책과 장난감, 책상으로 이뤄진 그들만의 놀이터다. 공부나 숙제는 거실에 놓인 공동 테이블에서 하고 미술을 하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곳은 지하에 있는 넓은 방이다. 방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과 책을 마음껏 보고 놀 수 있도록 특별한 인테리어는 하지 않았고 높이가 조절되는 책상과 의자, 360도로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만 두었다. 방을 하나로 텄기 때문에 아들 둘이 함께 지내기에도 넉넉한 공간이다. 이기임 씨는 테라스 앞의 벚나무에 벚꽃이 피는 4월이 가장 아름답다고 소개했다. 새순이 돋고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완연한 봄이 되면 집은 지금보다 더 화사해질 것이다.“벌써 9년이나 산 집이라 페인트칠도 새로 해야 하고 손볼 곳도 있어요. 남편과 이 자리에 다시 집을 짓자고 약속했는데 언제가 될진 모르겠네요. 조금 외진 동네지만, 그래서 아이들이 더 순수하고 밝게 크고 있다고 생각해요. 뒤뜰에서 농구도 하고 바비큐도 즐기면서 집이라는 공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길 바라요.” 여백의 미를 좋아하는 엄마는 아이들을 위해 잠시 자신의 취향을 절충해야 했지만 남다른 감각으로 꾸민 이 집은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안목을 선사할 것이다.에디터 신진수 | 포토그래퍼 임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