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과 컬러 플레이

기하학적 무늬가 어우러지는 모던한 집

기하학적 무늬가 어우러지는 모던한 집

 

기하학적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파브리스 주앙의 패밀리 홈.

 

지오반니 오프레디 Giovanni Offredi 디자인의 푸른색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파브리스 주앙의 컬러플레이 세라믹 화병이 활기차다. 두 개의 암체어는 생투앙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것. 벽난로의 색과 동일하게 맞춘 러그는 아뜰리에 피코 Atelier Picot 제품.

 

파리는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정작 파리에 사는 사람들은 교통난과 번잡함을 피해 외곽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실제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파리 중심인 생토노레 가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는 파브리스 주앙 Fabrice Juan도 그중 한 명. 대부분의 커플처럼 주앙 부부도 아이가 생기자 ‘파리 탈출’을 계획하게 되었고, 5년 전 라 갸렌-콜롬브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자동차로 10분이면 파리로 들어올 수 있는 편리한 접근성과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동시에 영위할 수 있는 이곳에서의 삶은 세 명의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무척 만족스럽다고.

 

파브리스 주앙이 디자인한 대리석 스툴 위에서 포즈를 취한 가족.

 

캐비닛 제작자, 즉 고급 가구 세공인으로 실내장식 업계에 발을 들인 그는 10년간 장-루이 드니오 Jean-Louis Deniot 사무실에서 디자이너로 실무 경력을 쌓은 후 2011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했다. 과거 장인으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기에 수작업에 대한 가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항상 많은 공예 공방과의 협업을 통해 고급 아파트, 빌라, 별장 등 프라이빗 공간을 시공해오고 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80㎡로 평소 작업하는 클라이언트 공간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차분하고 장식이 덜한 건축물과 단순하면서 그래픽적인 디자인 요소가 현대적으로 적용된 실내 디자인을 좋아해요. 그래서 원하는 기하학적 형태의 가구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직접 제작해서 배치하죠. 평소 의뢰 받는 작업 공간에 비해 사이즈는 작지만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됐어요. 특히 직접 사용할 공간이다 보니 장식품의 변화가 자주 있을 예정이라 전체적인 톤은 뉴트럴하게 유지하면서 색이 다양한 소품을 많이 배치한 것이 특징이에요. 색은 나의 작업에 무척 중요하거든요.”

 

다양한 컬러와 형태를 지닌 장식 오브제는 토모야 사카이 Tomoya Sakai 작품으로 파리의 디자인 갤러리 분 Boon에서 구입했다.

 

거실의 반대편을 서재로 꾸몄다. 거울과 천장 조명은 파브리스 주앙이 디자인했다. 테이블과 의자는 생투앙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것.

 

바실리 Vasarely 판화 아래 놓인 개인 책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의자는 아우구스토 살비니가 디자인한 팔플로나 Pamplona. 흰색 조명은 히로미 Hiromi.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후 미시아 Misia 패브릭을 교체한 빈티지 의자.

 

지난 1월 카펫 브랜드 타이핑 Tai Ping과 협업해 발표한 7가지 디자인의 카펫은 기존에 선보인 전통적 패턴이 아닌 대범한 컬러와 기하학적 무늬가 특징으로 오늘날의 모던한 실내 공간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너무 튀는 디자인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최근 1970년대 트렌드가 다시 돌아오면서 오히려 환영받는 반응을 느꼈다고. 카펫에 쓰인 원, 직선, 곡선으로 결합된 형태는 파브리스 주앙의 가구, 세라믹 소품 그리고 접시에서도 만날 수 있다. 대리석 회사 블랑 캬라흐 Blanc Carrare와 협업해 제작한 사이드 테이블 및 스툴 용도의 가구 ‘유니 Uni’, 유연한 곡선과 단단한 직선이 절묘하게 결합된 우아한 소파 ‘님프 Nymphe’, 거실 테이블에 놓인 토템 형식의 컬러풀한 도자 화병 ‘컬러플레이 Colorplay’는 공간을 경쾌하면서 독창적으로 만든다. 특히 프랑스 리모주 공방에서 제작된 도자 화병은 일렬로 나란히 세워 연출하거나 하나씩 따로 꽃을 꽂을 수도 있어 활용도가 높은 동시에 강렬한 컬러로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가구와 소품 외에도 빅토르 바자렐리 Victor Vasarely, 테드 라센 Ted Larsen처럼 구성적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의 작품만 골라 소장할 만큼 기하학 형태에 대한 열정이 아트 컬렉션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건축을 전공한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을 뽑았는데, 그의 미래주의적 스타일이 주된 영감의 원천이다. 하지만 파브리스의 디자인을 한 방향으로만 정의하기는 어렵다. 캐비닛 제작자 시절레는 네오클래식 전문가로 시작해 현재는 다양한 시대별 건축의 특징을 넓게 인지하고 있는 그는 인테리어 작업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으로 빛을 뽑았다.

 

마스터 베드룸. 사이드 테이블에는 1980년대 루이스 폴센 조명을 달았으며, 벽에 걸린 아플리케 장식은 히로미.

 

주방 싱크대의 상판과 벽은 쉽게 오염되지 않는 짐바브예 화강암을 사용했다. 도형 패턴이 돋보이는 접시는 파브리스 주앙이 직접 디자인한 제품이다.

 

“빛이 실내에 얼마만큼 그리고 어디까지 도달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현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에요. 그다음은 빛의 확보에 따라 공간을 나누거나 합치는 구성을 시작하죠. 보통 게스트룸에 빛이 적게 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밝고 확장성이 있는 소재와 컬러를 사용해 최대한 보완하는 방법을 써야 해요.” 고급스러운 실내 디자인의 베테랑인 그는 올해 파리에서만 4개의 프라이빗 아파트 그리고 캡 페레 해변의 대형 별장 프로젝트가 완공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 영감에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더해 작업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아름다운 기하학의 세계로 출발해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집과 가족은 일과 분리되었지만 최근 제작한 캐비닛 가구에 아들의 이름을 붙일 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그에게 창작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직접 디자인한 도형이 새겨진 접시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세 가족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클래식한 욕실에 사용된 거울과 조명은 모두 벼룩시장에서 구입했다. 욕실 입구에는 기하학 형태의 추상 작업을 하는 프랑스 화가 제네비에브 클래스 Geneviève Claisse의 작품을 걸었다.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반영된 손잡이.

 

현관에는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1950년대 디자인의 벽 조명을 설치했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파란색으로 꾸민 방. 1970년대 프랑스 영화 포스터와 구비 Gubi의 멀티 릿 Multi Lit 서스펜션 조명으로 아들의 취향을 반영했다. 침대 옆 세라믹 스툴은 미아 젠슨 Mia Jensen의 작품.

 

WEB www.fabricejuan.com

CREDIT

에디터

양윤정

photographer

Xavier Béjot

TAGS
온고지신의 마음

한국의 아름다움을 큐레이션하는 모순 갤러리

한국의 아름다움을 큐레이션하는 모순 갤러리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 공예 갤러리 모순 서울이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

 

박성욱 작가의 분청 도자들. 벽에 걸린 작품은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것으로 한겨울의 자작나무 숲을 연상시킨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마주하는 고즈넉한 동네, 정동.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 이른바 사대문 안에 자리해 예부터 왕실의 친가와 양반 관료들이 주거지로 삼았던 동네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100여 년 역사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신아기념관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싱어미싱회사의 한국 지부로 세워져 1960년대 신아일보사의 별관으로 사용됐던 그 건물. 중국에서 공수한 붉은 벽돌과 근대의 건축 기법이 잘 남아 있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10여 개의 업체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축, 인테리어, 패브릭, 도자기, 브랜드 홍보 등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리셉션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갤러리 전경. 구역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배치했다.

 

지난 2월 이곳에 터를 잡은 모순 서울도 그중 하나. 30대 중반의 젊은 남성이 운영하는 신생 공예 갤러리라니, 그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사연이 꽤나 궁금해졌다. “저는 굉장히 다양한 일을 해왔어요.” 모순 서울의 대표이자 큐레이터인 김예빈이 말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그의 이력은 처음부터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체계적이다. 어릴적부터 해외를 오가며 학창 생활을 한 뒤 3년간 영화판을 기웃거리기도 했으며, 부암동 젓가락 갤러리 ‘저집’의 매니저, 아트먼트뎁의 아트 디렉터, 매거진B의 브랜드 마케터 등 얼핏 봐도 30대 중반의 이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분야다. “미국 대학에서 회계와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군입대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과연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다들 통상적으로 하는 생각인데 저는 일단 저지르는 편이라 무엇이든 해보자는 생각이었죠.” 20대 때 산책하다 발견한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던 저집 갤러리 매니저 일도 그중 하나다. 당시 해외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옻칠 젓가락과 나전칠 젓가락의 구매 문의가 쇄도했는데 그 커뮤니케이션 일을 담당했던 것. “우리 공예품이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멋진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깨달은 계기가 됐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이 생기면 작은 막사발 하나 사고, 달항아리 사고 또 돈 모으면 황학동 가서 고가구 하나 사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잖아요. 단색화 같은 회화에 비해 한국 공예와 고가구 쪽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일을 제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신아기념관의 모습. 100여 년 전 근대건축 기법이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김예빈 대표가 24살에 처음으로 구입한 고가구 이층농. 돈을 모아 하나씩 구입한 게 벌써 여럿이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 구입한 빈티지 진공관 스피커. 전시에 맞게 플레이 리스트를 바꾼다.

 

부동산을 구하는 데에만 7개월이 걸렸다. 어떤 공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할지 부터가 큐레이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에 타협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신아기념관은 첫 페이지를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꼭 알맞았다. 80㎡ 남짓한 공간은 재정비를 마치고 단아한 화이트 큐브로 재탄생했다. “에르메스에서 했던 캠페인 중에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었어요. 형태는 달라도 결국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아름다움도 결국은 전 세계를 풍미해온 유럽의 예술 문화와 뿌리를 공유해요. 결국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인간 철학의 산물이니까요. 얼핏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름도 모순이라 지었어요.” 그가 기획한 첫 전시는 각기 다른 분청 기법을 사용하는 세 도예작가의 단체전 <Covered in Fog>. 안개가 낀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청 도자기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작가들을 일일이 찾아가 PT를 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지만 모두 그의 진심에 흔쾌히 응했다. 자작나무 숲을 분청 조각으로 표현하는 박성욱 작가와 표면에 문양을 찍는 인화 기법을 사용해 조각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김진규 작가, 단풍처럼 자연스러운 색감이 특징인 김상만 작가의 작품이 저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울긋불긋한 색감이 단풍이나 들판의 꽃을 연상시키는 김상만 작가의 작품들.

 

조각 칼로 문양을 내고 도장으로 문양을 찍는 기법을 사용해 조각적인 느낌이 나는 김진규 작가의 작품들.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을 배치해 한층 더 가까이에서 공예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이는 장미목 선반은 덴마크 빈티지 제품. 김상만 작가의 동양적 미감과 잘 어우러진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달항아리부터 2만원대 컵까지 실생활에서 공예를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격대로 큐레이션했다. 지금은 4월부터 예정되어 있는 박홍구 작가의 소반전 기획이 한창인데, 전시마다 새로운 가구와 플레이 리스트, 향을 선보일 예정. “신생 갤러리로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동안 해왔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다음 전시부터는 에디터도 함께 모든 기획에 동참할 예정이에요. 작가의 진솔한 내면을 담은 인터뷰와 영상도 만들 계획이고요. 전시 기간이 끝나도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해외 컬렉터들과 B2B 시장 쪽으로 홍보를 넓혀갈 계획이에요.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단순히 작품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한국의 아름다움을 해외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무엇보다 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모순 서울의 큐레이터인 김예빈 대표.

 

토끼가 새겨진 영국 빈티지 브리프 케이스. 계묘년의 기운을 받기 위해 직접 구입했다.

 

해외 빈티지 가구에도 관심이 많아 매 전시마다 새로운 가구와 배치를 선보일 계획이다.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현실

TAGS
나와 나 사이

김희수 작가가 그린 일상의 감정

김희수 작가가 그린 일상의 감정

 

당신의 삶에서 당신은 있는 그대로 온전한가요? 김희수 작가는 가늘게나마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불안으로 점철됐던 일상이 다시 반짝거렸다.

 

지하 1층과 1층을 ‘자문’ 시리즈로 구성한 전시 전경.

 

전시 제목이 <Monologue>예요. 혼자서 묻고 답하는 독백을 뜻하는데, 이번 전시의 구성도 자문과 자답으로 이뤄졌나요? 스스로 어떤 질문을 하고 답했는지 궁금해요.
저는 주로 일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요. <Monologue>는 제 일상을 영위하는 다양한 감정, 수많은 생각에서 출발한 작품의 모음이에요. 특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막연하게 불안했던 순간이 많았어요. ‘무엇을 그려야 하지?’ 혹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지?’ 아, 그럼 이 질문을 그림으로 한번 풀어보자 생각했죠. 자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느끼는 큰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작은 불안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불안하니까 한쪽 눈을 뜬 채 세상을 응시해요. 두 눈을 모두 뜨고 똑바로 바라보기에는 조금 겁도 나고 무서워서. 하지만 그렇다고 안 볼 수는 없는 그런 상태예요.

맞아요. 우린 무언가 정면으로 마주하기 두려울 때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실눈을 뜨죠. 질문은 곧 궁금증을 의미하고,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눈을 떠요. 그런데 ‘자답’에서는 모든 인물이 두 눈을 감고 있어요.
두 눈을 감은 모습은 도리어 어딘가를 지긋이 바라본다는 느낌을 줘요. 불안에 대해 질문하면서 살짝 떴던 눈을 다시 감은 이유도 나에게 집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죠. 본질은 자신에게 있고, 내가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지금까지 두 눈을 감은 그림을 그려왔던 이유도 너무 슬프지도, 너무 우울하지도, 너무 기쁘지도 않은 그 중간의 표정을 의도한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일상이니까요.

작품에 다양한 오브제가 등장해요. 부러진 연필, 종이비행기, 총알, 폭탄 등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생각하게 되는 요소가 곳곳에 있어요.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그리지는 않아 정답은 없어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거죠. 흔히 시간을 총알 같다고 말하잖아요? 그런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종이비행기에 미련을 두지 말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요. 편하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작품 안의 인물이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있는 우리 모두라고 말이에요.

 

 

인스타그램을 보면 손 글씨로 쓴 짧은 글귀가 많은데,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기보다 차가운 현실이나 채찍질에 가깝다고 느꼈어요.
의도하고 창작해서 쓴 글은 아니에요. 사실 그냥 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요. 예를 들면, 문득 불안한 마음에 달리기 시작했는데 빨리 달리지 못하니까, 그래 이건 오래달리기야 이렇게 생각하는 식이에요. 결국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난 어디에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약간의 일기 같은 작업인데 그 글들이 그림이 될 때가 많아요. 그림이 요리라면 글이 재료가 되는 거죠.

사진을 오랫동안 다뤘다고 들었어요. 사진과 그림은 비슷한 시각예술처럼 보이지만, 현실을 프레이밍하는 사진과 비현실을 확장해가는 그림은 사실 정반대의 성격을 띠어요. 장르를 넘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인물을 촬영한 포트레이트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제 성격이 내성적이다 보니 사진으로는 원하는 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어요. 초상을 작업하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죠. 그때 그림을 알게 됐어요. 엄청나게 큰 매력을 느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이 어려워 보였어요. 어려운 걸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진득하게 하려면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도 공부해야겠구나. 그러면 더 이상 직업적인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겁이 없었죠(웃음). 지금도 여전히 어렵고 재밌어요.

 

한쪽 눈을 뜨고 종이비행기를 응시하는 작품 ‘Question_untitled 12’.

 

두 눈을 감고 기타를 들고 있는 작품 ‘Answer_untitled 1’.

 

어려운 걸 찾아 그림을 그리게 됐고 여전히 어려운 것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건 너무나 쉽고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네요.
제 작품을 보는 분들은 어렵지 않게 봤으면 좋겠어요.

계속해서 언급되는 단어가 ‘일상’이에요. 그리고 작품에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는 후기를 많이 찾을 수 있었어요. 우리와 공통되는 일상에서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우리는 공감만으로도 위로와 따뜻함을 느끼니까요.

일상이란 주제가 쉬우면서도 어려워요. 그리고 절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우린 모두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자신의 일상에서 공감되는 부분만 공감해줘도 감사해요. 그럼에도 많은 분이 제 그림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해주세요.

그 부분이 정말 흥미로워요. 우린 각자의 일상을 살고 그 일상이 모두 다르겠지만,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결국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제 그림체가 우울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실제로 작품을 보면 자신이 힘들었던 순간이 느껴지면서 위로받고, 포근했다는 감상도 많이 이야기해요. 나와 같은 사람들, 비슷한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4월 16일까지 <Monologue> 전시가 열리는 에브리데이몬데이는 이제 벚꽃으로 뒤덮일 석촌호수 옆에 있어요. 전시가 어렵지 않고 재밌어서 산책하다 가볍게 들러 감상하기 좋을 것 같아요.
캐주얼하게 준비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오셔서 나도 이랬지, 너도 그랬니 하면서 있는 그대로 편하게 봐주면 좋겠어요. 있는 그대로가 제일 가치 있는 법이니까요.

그게 또 일상이기도 하고요.
맞아요(웃음).

CREDIT

어시스턴트 에디터

강성엽

TA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