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지의 플래그십 스토어, 교보문고와 핫트랙스 리뉴얼 프로젝트, 챕터원 한남등 이름만 들어도 자연스레 각 공간의 아이코닉한 모습이 선연히 그려진다. 각 브랜드의 정체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저마다의 해법으로 풀어낸 공간이 이토록 뇌리에 선명한 이유는 공간을 대하는 디자이너의 뛰어난 창의성과 세심한 분석이 기반이 됐기 때문이리라. 앞서 말한 상업 공간은 모두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WGNB가 구현한 것이다. 현재 백종환 소장과 신종현 소장이 공동으로 대표직을 역임하고 있는 WGNB는단지 건축뿐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오브제 등 공간의 A to Z를 창조해내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는다. 그런 그들이 연남동에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전 거처였던 합정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사실 여긴 출퇴근길로 자주 오가던 곳이에요. 사무실을 이전하기 위해 여러 곳을 생각해봤지만, 여기가 좋을 것 같았어요.” 백종환 소장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되짚었다. 연남동의 한 대로변에 위치한 WGNB의 새로운 사무실은 30여 년이 훌쩍 지난 4층 규모의 다가구 주택으로 사용되던 건물에 자리한다. 처음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오래된 건물이었음에도 예스런 외관을 별다른 개편 없이 그대로 둔 점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건물의 연식을 고려해 내부는 물론 외관까지 새롭게 단장할 수도 있었지만 두 소장의 선택은 달랐던 것. “건물이 쌓아온 시간과 지역성은 그 자체로 건물이 지닌 유산이에요. 부수지 않고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뿐더러, 이 동네와 건물이 지녀온 역사를 보존하고 싶었죠. 도시 재생과 재생 건축,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저희 사무실에도 적용하고 싶었어요.” 이어 신 종현 소장은 한 일화를 예로 들며 설명을 이어갔다.
바로 옆에 위치했던 건물과 쌍둥이였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옆 건물과 달리, 건물에 설치된 콘크리트 턱에 앉아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모습을 보며 ‘아 할머니들이 이곳을 원래 있던 것처럼 사용하실 만큼 오래되고 지역적인 건축이 되었구나’ 싶었다고.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계단의 골격이나 군데군데 노출된 콘크리트 마감 등은 이전에 어떤 공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흔적은 유지하되, 사무실로 사용되는 각 층의 내부는 사뭇 모던한 인상을 전하기 때문. 가장 우선적으로 사람으로 치면 혈관이나 뼈 등 몸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배관이나 냉난방 시설 그리고 전형적인 1990년대 주거 공간처럼 짜인 구조에서 탈피하고 개편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어 군더더기를 배제하며 백색의 톤으로 내부를 마감해 마치 화이트 큐브와도 같은 인상을 만들어냈다. 구태여 장식적인 요소 대신 여백을 활용한 것. 이어 가장 눈에 띄는 건축적인 두 가지 변화는 증축과 보이드 공간의 탄생이다. 본래 4층 규모였던 주택의 용도를 변경하고 한 층을 더 마련해 총 5층 규모로 만든 다음, 용적률이 높은 4층과 5층의 슬라브를 헐어 마치 건물의 주축 겸 구심점이 되어주는 보이드 공간을 구현했다.
3층에서 5층까지 길게 수직으로 이어지는 보이드 공간은 직원들을 분절된 층에 분산시킴으로써 우려되는 소통의 부재를 타개하기 위한 영민한 아이디어였다. 각 층의 내부 면적이 20평대 정도로 꽤 좁은 편인데다, 17명 정도 되는 인원을 한 층에 수용할 수 없는 현실적인 여건이 건물의 아이코닉함을 한껏 더하는 이색적인 재미를 만들어준 셈이다. “보이드 공간을 타고 다양한 소리가 들려요. 누군가가 열심히 키보드를 치거나 안부를 묻는 등 사소하지만 서로의 안위를 바로 마주 할 수는 없어도 소리로는 인지하는 거죠. 가끔은 휴지가 필요할 때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던져주기도 하고요. 저희한테는 마당 같은 요소예요.” 보이드 공간 하나로 자잘한 소통이 원활해졌다며 두 소장이 웃으며 말했다. 보이드가 높고 좁은 수직형 건물에 소통과 조응의 창구가 되어준다면 5층을 물리적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의 필요성을 두 소장이 인식하게 된 데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5년 정도 오랜 연을 유지해온 클라이언트 분이 계세요. 제주도에서 미술관을 운영하시는 할머니세요. 일흔이 훌쩍 넘으셨죠. 이전 2층 주택에 있던 사무실을 방문하실 때도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는데, 좁고 높은 계단을 타고 저희를 찾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백종환 소장이 엘리베이터 설치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 생각이 든 후 백 소장은 다세대 주택의 특징인 획일화된 구조를 복기하며 공통된 위치에 난 화장실을 엘리베이터를 내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래된 연을 배려하는 마음이 직원들의 편의성을 높여줄 장치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우스갯소리로 직원들끼리는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고 신 소장은 전했다.
두 소장이 소통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또 하나의 요소는 빛이다. 일하는 공간은 밝아야 하며, 밝은 분위기가 전하는 생기가 디자이너들의 영감과 창의성에 필수라고 여겼던 탓이다.이를 위해 보이드 공간 곳곳에 큰 창을 냈는데 덕택에 최소한의 조명만 켜도 사무실 전체가 화사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특히 5층 디렉터스룸과 연결된 천장 창은 낮에 따로 조명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해사한 빛이 쏟아지는데, 보이드를 타고 이 빛이 각층에 고루 흘러가는 점도 각각의 층을 하나로 이어준다는 인상을 준다. “저희가 머무는 디렉터스룸은 5층에 있는데, 빛이 가장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곳이에요. 천장에 난 창을 통해 저희가 만들고 수집한 조명과 가구, 오브제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데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그림자와 빛의 세기와 모양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걸 보는 재미도 있더라고요.” 신소장이 말했다. 새롭게 터를 짠지 5개월 가량 흘렀지만, 직원들과 두 소장은 이곳에 더없는 만족감을 표했다. 새로운 사무실에 대한 기대감에 2주 만에 초안을 그렸다는 말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제 새하얀 배에 다 같은 마음으로 승선한 것만 같다고. 그들을 보며 누군가를 위한 상업 공간이 아닌 스스로의 하루를 쏟는 공간을 직접 짓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라는 물음이 일었다. 건물의 지역성과 역사성과는 상생하되, 내부만큼은 소통과 교류, 직업적인 환경을 위해 조응하는 공간을 만들어낸 이들이 이곳에서 탄생시킬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심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