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의 맛과 멋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엄태준의 솔밤 이야기.

안심과 양송이로 만든 뒥셀을 넣어 말은 송화버섯과 브라운 버터에 볶은 꽃송이버섯. 곤드레 장아찌와 참죽나물을 올리고 양지와 버섯 베이스 소스를 함께 곁들였다.
태양이 떠 있는 각도에 따라 1년을 나눈 24절기.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씨를 뿌리기 시작하는 망종, 일교차가 커지는 처서, 겨울 큰 추위가 오는 대한까지, 우리 옛 선조는 절기마다 삼면을 둘러싼 바다와 산, 들에서 난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해먹었다. ‘한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1년이 걸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이유.

크림으로 만든 바바로아 소스 위에 캐비어와 단새우를 레몬 제스트와 함께 곁들인 메뉴. 위에는 대파와 파프리카 컬, 딜꽃을 올리고 직접 구운 크래커를 함께 냈다.

미술관에서 영감을 받은 깔끔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20살에 상경한 뒤 호텔에서 중식 요리사로 4년간 일하던 엄태준 셰프는 27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미국 CIA 유학길에 다시 올랐다. 기본기부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치열한 생활을 이어갔다. 한국으로 돌아와 프렌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임프레션에서 일했지만, 그의 가슴 한 켠에는 늘 한식이 있었다.

솔밤을 이끄는 엄태준 오너 셰프.
임프레션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오랜 기간에 걸쳐 솔밤의 모습을 차곡차곡 그려 나갔다. 인테리어는 좋아하는 미술관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핀 조명을 맞춘 테이블에 계절에 맞게 변화하는 음식을 작품처럼 내고, 손님들이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습을 꿈꿨다. 레스토랑 이름은 달빛에 비치는 소나무가 아름다운 곳을 뜻하는 안동의 옛 지명이자 그의 고향인 솔밤으로 지었다. 코로나19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오픈 11개월 만에 미쉐린 가이드에서 1개의 별을 받았다. 3년 차를 맞이한 지금, 솔밤의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다.

홀에서 바라본 키친의 모습.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하잖아요.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면 누가 몰라주겠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할 거면, 한식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애호박과 건새우는 예부터 전해내려온 조합이잖아요. 저는 뿌리에 맞게 발전해온 그런 음식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거죠.”

칼을 좋아해 2년씩 기다려서 받기도 한다는 엄태준 셰프. 터키석 손잡이 칼은 천재 제작자라 불리는 일본 쿠로사키가 만든 제품이다.
코리안 컨템포러리에 속하는 솔밤은 계절과 절기에 입각한 한국 식재료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물론 한국적인 요리 테크닉을 바탕으로 동시대를 담아내는 현대적 요리를 선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엄태준 셰프는 레스토랑이 쉬는 날에도 통영의 합자장 명인 등 사라져가는 한식을 공부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솔밤은 약 13코스로 이루어진 디너만 영업하는데, 물 흘러가듯 튀지 않는 요리와 흐름의 연계성을 중시하는 엄태준 셰프의 철학 때문이다.

메추리 가슴살 안에 트러플 필링을 넣은 메뉴.
“수익 측 면을 보면 런치도 영업을 하는 게 맞아요. 일반적으로 런치는 디너를 쇼트 버전으로 만들어서 선보이는데, 그럼 아무래도 더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요. 저는 아직 제가 의도한 바를 그 짧은 시간에 매력적으로 표현해내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제 능력으로는 모든 테이블을 섬세하게 케어할 수 있는 숫자도 25명 이하라 예약도 그렇게만 받고 있어요.”

솔밤은 총 9개의 테이블이 있다. 섬세한 케어를 위해 25명 이하의 예약을 받는다.
엄태준 셰프는 코스가 끝난 뒤의 시간까지도 섬세하게 신경 쓰는데, 코스 시작 전에 고른 원목 젓가락과 함께 스콘, 잼을 싸주는 이유. 다음 날 아침과 각자의 일상에서도 문득 솔밤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선물인 것이다.

손님 테이블 앞까지 서빙하는 바 트롤리. 엄태준 셰프가 직접 고안한 것이다.
극장에 한 편의 영화를 올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름이 필요하다.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 투자자, 배급사 직원, 배우, 잠시 스쳐 지나간 단역까지.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 파인다이닝 주방의 업무도 매일 영화 한 편을 만들어 올리는 일에 가깝다. 엄태준 셰프는 솔밤이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좋은 팀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코스가 끝나갈 즈음 메뉴와 함께 19명의 이름이 써 있는 엔딩 크레딧을 손님상에 올리는데, QR코드를 통해 각자의 역할과 그들의 스토리를 상세하게 읽어볼 수 있다.

식사 전 손님들에게 고르게 하는 8종의 원목 젓가락.
“솔밤이 엄태준의 서사가 되길 바라진 않아요. 그러면 엄태준이라는 한계치만큼만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제 자식 같긴 하지만, 자식이 제가 되길 바라지는 않잖아요. 단지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는 하나의 세계관인 거죠. 이곳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서비스, 음식에 대한 마음이 느껴진다면 그게 바로 파인 아트가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