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곁에 선 집

성벽 곁에 선 집

성벽 곁에 선 집

성벽을 따라 난 골목, 담백한 위엄이 느껴지는 집. JtKLab 강정태 소장이 설계한 산과 성벽,
시간과 풍경을 품은 이 집은 한 부부가 꿈꿔온 두 번째 삶의 무대다.

북악산, 인왕산, 북한산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2층 창문.

나무로 둘러싸여 숲 속 별장 같은 느낌을 주는 집 전경.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성벽, 이를 따라 길이 난 서울 한 주택가의 골목을 오르다 보면 담백하면서도 꼿꼿한 위엄이 느껴지는 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 들어서면 바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집이라기보다는 산 속 평화로운 별장을 닮은 곳으로서, 지난해 정년 퇴임한 뒤 꿈꿔온 드림하우스를 실현시킨 집주인과 그 아내의 세컨하우스다. 특이점이 있다면 보통 서울에 본집을 두고, 그 외곽에 세컨하우스를 마련하는 이들과는 달리 이 부부는 반대의 경우라는 것. 경기도 용인에 본집을 둔 집주인은 성벽을 마주보는 부암동의 터전에 세컨하우스를 정했다. 평소 산을 다니며 성벽 바라보는 걸 즐겼다는 그에게 이 집은 찾아 헤맸다기보다는 ‘스스로 찾아온’ 집이었다. “성벽 근처의 동네를 돌며 집을 찾아볼 때는 마땅한 곳이 없었는데,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을 즈음 이 집이 나를 찾아왔죠. 마침 수요가 딱 맞아떨어졌어요.”

리노베이션은 JtKLab 강정태 소장의 작품이다. 지붕부터 시작해 사소한 디테일 하나까지 신경 쓴 그는 미니멀한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육안으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곳에도 힘을 쏟았다. 섀도 갭으로 이어진 벽과 천장이 만나는 경계, 최소한의 존재감만 남아 있는 경첩, 계단의 선과 이어지는 스토리지 선반의 그리드와 공간의 단절을 막기 위해 거실이 아닌 벽쪽으로 자리한 계단 난간까지, 모두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설계됐다. 트리밍 라인 없이 빛만 존재하게 한 매립형 천장 조명과 공간감을 넓혀주는 간접조명, 그리고 마주보는 창의 위치와 비율이 일대일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2층 구조 또한 마찬가지. 무엇보다도 집주인이 갈망했던 성곽의 풍경과 북한산과 북악산, 인왕산이 내려다보이는 뷰를 위해 넓은 통창으로 개방감을 주는 것 또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2층 침실에는 개방 가능한 천창 또한 설치해 자연의 빛과 소리를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성곽에서 내려다본 집.

강정태 소장은 공간을 미니멀하게 연출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디테일에도 힘썼다. 계단의 선과 일치하는 선반의 그리드도 그중 하나.

집을 둘러싼 산의 풍경을 온전히 담기 위해 통창을 설치했다.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 난간은 공간에 개방감을 부여하기 위해 벽쪽에 위치한다.

보일러실이었던 곳은 커피머신이 들어선 전이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문을 열면 신발을 벗지 않고도 바깥 정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외벽의 마감은 물성에 깊이를 주기 위해 스페인 회사 세멘트 디자인의 제품을 활용했다. “자세히 보면 그리드의 가로선이 랜덤으로 흐르는데, 시간이 지나며 내추럴함이 돋아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단순하게 작업하면 흥미롭지 않잖아요. 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래에 있는 단열 보드 때문에 그리드가 틀어지는데, 이를 숨기기 위한 트릭이기도 한 셈이죠.” 빗물이 흐르는 파이프 또한 과감하게 제거했다. 대신 외벽 양쪽 끝에 길을 내 빗물이 흐르도록 했다. 실용적인 동시에 미적 욕구를 충족해주는 선택지였다. 낮았던 지붕도 확장을 통해 선을 살리는 동시에 높이를 높였다. 깔끔함을 선호하는 집주인의 취향에 맞춰 집 톤은 전반적으로 오프화이트로 통일성을 부여했지만,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새롭게 설치한 내부 기둥은 오렌지색으로 칠해 선명한 활기 또한 부여했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면 항상 듣는 말이, 눈에 거슬리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화려해서 탄성을 자아내기보다는, 반듯하고 정돈된 디테일이 크게 티가 나진 않아도 보는 이를 편하게 해주는 거죠.” 담백함을 선호하는 집주인의 취향은 강 소장의 작업 방식과 일맥상통해 그 어느 때 보다도 즐거운 작업이 가능하게 했다. 강 소장은 말한다. “원래 있던 건물을 다시 설계할 때, 기존에 있던 것은 그대로 둬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설계하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런 관념에 최대한 저항하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클라이언트와 소통을 많이 한 작업이기도 해요.” 집 주인의 니즈와 의중을 파악하고, 때로는 설득과 타협, 치밀한 계산을 통해 탄생한 이 집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무게를 더해가는 성벽과 함께 깊고 단단한 터전을 이뤄갈 것이다.

바닥부터 책꽂이, 천장까지 이어지는 나무의 질감.

보일러실이었던 곳을 전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집주인의 아이디어로 주방의 수납장과 작업대는 칸스톤으로 마무리하며 물성을 부여했다.

정원의 흙은 사비석으로 채웠다.

미니멀한 디테일들이 돋보이는 2층의 화장실과 천장.

2층 침실에 천창을 설치해 자연광이 쏟아지도록 했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 집의 모습. 구조적인 물성이 돋보인다.

집 외관에는 세월이 갈수록 자연스러운 시간의 흔적이 새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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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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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CHAOS TO THE COSMOS

FROM THE CHAOS TO THE COSMOS

FROM THE CHAOS TO THE COSMOS

이탈리아 출판인 프랑코 마리아 리치의 다소 엉뚱한 도박으로 만들어진 이 매력적인 식물 미로는 30만 그루의
대나무로 이뤄져 있다. 미로 한가운데에는 피라미드와 그의 아트 컬렉션이 자리한다.

유기적 건축물의 식물 조각은 칸야 비바 Canya Viva가 제작했다. 예술가와 건축가들의 집단인 칸야 비바는 사탕수수와 대나무를 가공하고 이 생태 자원으로 지속적이거나 해체 가능한 정자를 제작한다.

건축가 다비데 두토가 디자인한 별 모양의 식물 미로가 10주년을 맞았다. 사각형 두 개를 포개어놓은 형태의 미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정원과 크레타 섬의 미로, 로마의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얻었다.

건축가 피에르 카를로 본템피가 디자인한 피라미드와 예배당의 고요함 속, 대리석 바닥의 미로 모티프가 노트르담 드 샤르트르 Notre-Dame de Chartres 같은 중세 교회를 연상시킨다. 17세기의 나무 재단 옆에는 안토니오 스키아시 Antonio Schiassi의 테라코타 조각 두 점, <애 (Lamentation)>와 <베로니카(Veronica)>가 있다.

리치가 피라미드 안에 설치한 예배당은 나아갈 길에 대한 알레고리로, 미로가 실수와 함정이 흩뿌려진 인문주의적, 정신적 여정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방문객들에게 일깨운다.

8만㎡에 펼쳐진 실제 크기의 탈출 게임마저 가능한, 구체화된 유토피 아이자 내적 오디세이아. 파르메 Parme 근처의 시골 동네 폰타넬라토 Fontanellato에 자리한 라비린토 델라 마조네 Labirinto Della Masone. 2015년부터 대중에게 오픈된 이곳은 하나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 1977년, 저명한 예술 잡지 <FMR>의 편집자이자 컬렉터인 프랑코 마리 아 리치가 자신처럼 미로의 신성하고 세속적인 차원에 매료된 작가 친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에게 미로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결국 책의 페이지를 구성하는 일과 미로를 심는 일은 거의 비슷해요. 공간에 여러 가지 요소를 배치하는 것이니까요.” 이와 같이 평가한 프랑코 마리아 리치는 타이포그라피에 열정을 지닌 박학다식한 전문가였는데, 202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이디어는 1990년대에 건축가 다비데 두토 Davide Dutto와 함께 조금씩 구체화되었고, 15세기 말에 수도사 프란체스코 콜로나Francesco Colonna가 지은 몽환적인 소설 ≪폴리 필리아의 꿈≫에 묘사된 사랑의 섬 ‘키테라 Cythera’에서 영감을 얻었다. 일곱 갈래로 이뤄진 크레타 섬의 미로와 로마의 기하학을 재해석한 별 모양의 현대적인 미로 ‘라비린토 Labirinto’는 필라레테 Filarete의 건축 개론서에 묘사된 르네상스의 이상적 도시 ‘우르비스 Urbis’를 구현하고 있다. 프랑스 건축가 불레 Boullee, 르두 Ledoux, 그리고 이탈리아 건축가 안톨리니 Antolini 등의 프랑스혁명 후 생긴 네오클래식 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건축가 피에르 카를로 본템피 Pier Carlo Bontempi는 미로 안에 가묘 형태의 피라미드와 예배당을 지었다. 피라미드와 예배당은 미로의 중심에 있다. 르네상스 정원에서 미로가 믿음에 대한 구불구불한 길과 인간 조건에 대한 은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이러한 규칙을 따른 것이다. 이곳 식물 미로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높이가 3~5m에 달하는 여러 종류의 대나무를 심어 둥근 천장을 이루었다. 프랑코 마리아 리치는 대나무를 ‘강인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빨리 자라고 잎이 오래가는’ 식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프랑스 앙뒤즈 Anduze의 대나무 정원 ‘라 방부즈래 La Bambouseraie’에서 영감을 얻었다.

신비로운 녹색 길. 마치 식물로 이뤄진 성벽 같은 미로의 우아한 굴곡이 폰타넬라토 시골에 거대한 수풀처럼 숨어 있다.

애서가이자 컬렉터인 편집자의 은밀한 삶. 미로 정원 밖에는 포 Po 평원의 전형적인 네오클래식 양식의 벽돌 건물이 있다. 건물 안에는 프랑코 마리아 리치의 18~19세기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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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상 티베르 Vincent Thi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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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with Rhythm

Living with Rhythm

Living with Rhythm

채도 높은 색감, 거침없는 패턴, 리듬을 따라 전개되는 장면들. ‘보여주는 집’을 넘어서 ‘살아보게 하는 집’으로 확장된 까사오넬라는
느린 박자라는 감각에 집중한 실험적 인테리어를 공개했다.

지중해의 리듬을 담은 거실 전경. 파지니 특유의 색 구성과 구조적 개방감이 공간을 관통한다. © Sara Soldano, 5VIE

아트 디렉터 마리아 비토리아 파지니. 까사오넬라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공간의 스토리텔러다.

© Sara Soldano, 5VIE

거울, 그림, 조각 오브제가 뒤섞인 장면. 일상의 틈에 유머와 상상이 개입된다.© Isabella Magnani

벽을 따라 펼쳐지는 아치 구조는 공간의 리듬을 만드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한다. © Isabella Magnani

매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새로운 구성으로 소개되는 까사오넬라 Casaornella는 전시 공간이자 거주 개념을 실험하는 쇼하우스 프로젝트다. 아트 디렉터 마리아 비토리아 파지니 Maria Vittoria Paggini가 이끄는 이번 시즌 테마는 ‘Mediterranea – Andamento Lento’, 즉 ‘지중해’와 ‘느린 흐름’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에는 디자인 위크 기간에만 문을 여는 일시적 공간이었다면, 올해부터는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까사오넬라는 이제 상설로 운영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쇼하우스이자 디자인 실험의 플랫폼으로 확장된 것. 입구에 들어서면 녹색 세라믹 타일 바닥 위에 놓인 지오 폰티의 세면대, 마몰리의 수전, 그리고 이탈리아 타일 브랜드 퀸테센자 체라미케의 타일이 ‘물의 의식’이라는 인트로 장면을 만든다. 하얀 벽을 따라 이어지는 파란 프레스코 천장과 뾰족한 아치형 구조, 길게 드리운 거울 등 장식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흐름을 조율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욕실은 침실로 이어지는 하나의 전환 장면이 되고, 주방은 기능을 넘어 오감을 자극하는 실험실처럼 구성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파지니가 연출한 컬러의 리듬감이다. 짙은 블루의 하이글로시 키친, 동물 무늬 벽지와 붉은색 타일, 녹색 거울과 원색 오브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공간의 전체 분위기를 형성한다.

테라조, 벨벳, 스트라이프 등 서로 다른 감각이 충돌하며 작은 휴식처를 이룬다. © ISara Soldano, 5VIE

다채로운 재료와 텍스처의 충돌. 파지니의 공간은 예상 밖 조합에서 생동감을 얻는다. © ISara Soldano, 5VIE

레오파드 프린트와 원형 수납장이 시선을 사로잡는 조리 공간. © ISara Soldano, 5VIE

동물 프린트와 녹색 유리, 반사 패널이 뒤섞인 키친. © ISara Soldano, 5VIE

기하학적 조명과 테이블, 오브제가 어우러진 침실. © ISara Soldano, 5VIE

소프트하우스와 협업한 테이블과 오브제. 부드러운 조형성과 유쾌한 소재감이 중심이다. © ISara Soldano, 5VIE

하이글로시 블루의 키친 공간. 기능 중심의 구성 안에 유화 초상화가 이질적 리듬을 만든다. © Isabella Magnani

스트라이프 벽지와 공간의 중심에서 시선을 이끄는 회화 작품이 인상적인 욕실. © Isabella Magnani

까사오넬라에는 두 개의 주방이 공존한다. 하나는 거실과 이어지는 장식적 성격의 키친으로서 애니멀 프린트 벽지와 대리석 상판에 글로시한 소재들이 조화를 이룬다. 다른 하나는 실용적인 블루 톤의 주방으로서, KWC 수전과 셰프 니코 로미토가 개발한 식재료 라인이 함께 구성된 조리 공간의 기능을 보여준다. 파지니는 이번 전시에서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소프트하우스와 협업한 가구도 다수 선보였다. 곡선 실루엣이 특징인 침대 로미오를 비롯해 유리 테이블, 우드 수납장, 플루티드 미러를 적용한 대형 식탁 등 다양한 오브제가 기능성과 시각적 완성도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은 ‘살라 콘비비오 Sala Convivio’라는 식사 공간이다. 뾰족한 아치 형태의 조형적 구조물이 공간을 분절하면서도 시선을 유도하고, 퀸테센자 체라미케의 타일이 이를 감싸며 리듬을 만들어낸다. 중앙에는 널찍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감귤과 채소, 셰프 니코 로미토의 유리 과일 오브제가 함께 연출되어 지중해의 계절감과 식문화를 보여준다. 주변에는 스트라이프 벽면, 빈티지 그림, 세라믹으로 만든 수영복 오브제, 그리고 다양한 공예품이 믹스매치되어 위트 있는 분위기를 더한다. 낯선 재료, 평범하지 않은 오브제, 기능과 장식 사이를 오가는 가구와 구조물로 하여금 일상적인 집 풍경을 색다르게 해석한 까사오넬라. 이 집이 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완벽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익숙한 공간 안에서 감각을 천천히 환기시키는 방식이다. 마리아 비토리아 파지니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우리는 조금 더 느린 박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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