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할머니의 손때 묻은 조리서 한 권에서 시작된 세대와 세대,
기억과 맛을 잇는 작은 공간 이야기.

문을 열면 부엌의 형태를 갖춘 바 공간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공간 디자인은 엔알디자인팩토리의 김나리 소장이 진행했다.

막걸리를 재료로 한 증편과 약편을 정성스럽게 차려냈다.

청주부엌의 강신혜 대표.

윤형근 화백의 화폭에서 영감을 얻은 공간의 색과 옻칠한 한지로 만든 한지 문살이 한국적인 느낌을 살린다.
취미로 시작한 요리가 어느새 업이 되었다. 1988년부터 30여 년간 <싱글즈>, <쎄씨>, <여성중앙> 등 다양한 잡지에 몸 담으며 일해온 ‘1913 청주부엌’(이하 청주부엌) 강신혜 대표의 이야기다. 이름에 쓰인 ‘1913’은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고조리서 <반찬등속>이 편찬된 연도를 의미한다. <반찬등속>은 충북 지역 유일한 고조리서이자, 총 46가지 음식의 조리법이 기록된 귀중한 자료다. 이를 편찬한 진주 강씨 집안 며느리 밀양 손씨는 청주부엌 강신혜 대표의 고조할머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강신혜 대표의 아버지는 잡지 일을 쉬고 있던 그에게 <반찬등속>과 관련된 일을 해보라 했고, 이는 곧 관련 저서 두권 출판에 이어 청주부엌 오픈으로까지 이어졌다.

40년 된 오랜 양옥을 개조한 청주부엌은 현대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인테리어를 갖췄다.
대표가 오래전부터 한국전래음식연구회에서 요리를 배우고, 여러 자격증까지 취득할 정도로 음식에 진심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집안에 내재된 DNA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음식으로 정을 나누고, 추억 쌓는 법을 배운 그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날엔 뷔페에 데려가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대학 들어가던 날엔 양식집에서 스테이크 나이프와 포크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당시엔 흔한 일이 아니었지요.” 외식으로 맛본 좋은 음식을 집에 있는 육남매에게 재현해준 것 또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병상에서 남긴 말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그 이전부터 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의 이야기를 녹취해가며 <반찬등속> 관련 자료를 모으던 그는 본격적으로 공부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이 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배운 조리법을 실제로 만들어보는 일상이 3~4년간 반복됐다. 다른 고조리서들도 참고해가며 연도별 역사까지 세세하게 분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래야만 오늘날과 다소 다른 옛 방식의 조리법을 이해하고, 그것을 재현하고 현대화한 과정을 담은 책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각각 2022년과 2024년, <반찬등속, 할머니 말씀대로 하는 김치 이야기>와 <반찬등속, 할머니 말씀대로 하는 한과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간장과 꿀로 간한 떡가루에 호두, 대추, 밤 잣 등 포함한 5가지 소를 넣어 완성한 궁중 두텁떡.

곶감채가 들어간 수정과는 얼음을 갈아 그라니타처럼 시원하게 선보인다.

강신혜 대표의 취향이 묻어난 소품들이 가게 한편을 장식한다.
청주부엌은 그 흐름의 연장선에서 문을 연 것이다. 서울에 두 발 붙이고 살아온 그가 청주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어머니와 오빠밖에 없었지만 그 외 다른 지역에서 식당을 여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공간의 색은 청주 화가 윤형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고, 식당 한쪽은 부엌 형태를 갖추기 원했다. 고조할머니가 반찬을 적어놓던 곳도, 아버지가 요리를 재현해주던 공간도 결국 부엌이었다. “생명을 이어가고, 세대를 이어가는 장소가 부엌이잖아요.” 공간의 구현은 엔알디자인팩토리의 김나리 소장이 진행했다. 40년 된 오래된 양옥에 현대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현대적 분할이 들어간 유리창살과 옻칠한 한지로 만든 한지문살로 공간을 살렸다. 제대로 된 떡 만드는 것을 배우기 위해 짧은 기간이나마 명인의 가게에서 일하고 숙식을 해결해가며 조리법 또한 익혔다. 현재 가게에서 선보이는 화병은 <반찬등속> 속 레시피를 그대로 구현한 메뉴다. 길게 쳐서 늘인 인절미 위에 달걀 지단과 실고추를 꽃잎처럼 얇게 썰어 장식한 화병은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다. 정갈하게 담긴 떡을 먹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까지 단정히 정돈되는 느낌이다. 떡이 고급 디저트가 되기 바라는 강신혜 대표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부담없이 즐기되 충분히 특별한, 기꺼이 대접받는 느낌이 드는 음식이 되기 바라는 마음이. 그래서인지 청주부엌에서 내는 떡 종류는 많지 않다. 양보다는 질에 집중한다. 두텁떡, 화병 등 ‘고정 칼럼’ 같은 메뉴 옆엔 살구, 초당옥수수처럼 계절과 시기에 맞는 식재료로 만든 ‘특집 떡’이 그 자리를 채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잡지 출신인가 봐요. 이 공간도 잡지처럼 생각하게 돼요.” 습관처럼 흘러나온 농담을 건네면서도, 청주부엌과 <반찬등속>에 관해서라면 말투가 달라진다. 오래된 조리서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이 작업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세대와 문화, 감각을 잇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낡은 조리서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오늘날의 감각으로 이어가는 살아 있는 공간. 잡지처럼 매 시즌을 기획하고 새로운 특집을 준비하는 이곳에는 한 사람의 일생과 가족사, 지역의 전통과 감각, 오랜 기록을 재해석하려는 기획자의 시선이 고루 녹아 있다.

<반찬등속> 속 레시피를 구현한 화병엔 달걀 지단과 실고추를 얇게 썰어 고물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