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식재료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정성.
정직한 한 끼로 전하는 가겐의 가이세키 이야기.

가겐의 여름 핫슨. 단호박 스리나가시, 한치와 오크라를 함께 담은 이카소면, 전갱이 초밥, 아나고 가라아게와 은은한 청매실로 차려냈다.

정돈된 분위기의 가겐 매장 전경.

가겐의 최현아, 원진희 셰프.
가겐은 정직하다. 메뉴 하나하나엔 제철 식재료 고유의 맛과 향이 배어 있고, 공간을 채운 식기와 도구엔 고민하고 고심해서 고른 흔적이 서려 있다. 원진희, 최현아 셰프의 특색을 조화롭게 녹여낸 메뉴들을 선보이는 이곳은 가이세키 레스토랑이다. “가이세키 요리를 한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껴요. 제철 식재료를 제때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영양도 풍부한데, 다양한 식기에 이를 정성스럽게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가이세키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해요.” 2023년 가겐을 처음 열 때만 해도 ‘고급 일식’ 하면 대부분 스시 오마카세를 떠올렸다. 가이세키는 여전히 대중에게 생소한 단어였고, 일본 온천 료칸에서 접한 요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쿄의 유서 깊은 일식당 쿠로기와 (당시 기준) 16년 연속 미쉐린 3스타를 받은 칸다에서 경력을 쌓은 두 셰프에게도 한국에 가이세키 전문 레스토랑을 여는 것은 적잖은 도전이었다. “가이세키가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라는 인식을 주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어요. 가이세키 하면 보통 심심한 맛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비교적 강한 맛이 특징인 쿠로기와 재료 본연의 맑은 맛을 중시하는 칸다의 요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균형을 맞추고자 했죠.” 접객부터 ‘카리스마 넘치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쿠로기의 방식이라면, 칸다의 분위기는 한층 차분하고 온화하다. 철이 바뀔 때마다 코스 메뉴를 새롭게 짜는 원진희 셰프는 각자의 스타일을 교차시키며 코스 전체의 강약을 조절한다. “슴슴한 건 확실히 슴슴하게, 강한 건 확실히 강하게. 그런식으로 구성해요.” 쿠로기 소면이 최현아 셰프의 오완 요리 이후에 서빙되는 것도 그런 계산의 일환이다. 강한 감칠맛을 자랑하는 소면을 먼저 내면 오완 본연의 깊은 맛이 묻히기 때문이다. 가겐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쿠로기 소면’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쿠로기에서 전수한 요리다. 우니와 캐비아, 소면, 냉육수라는 다소 익숙한 조합이지만, 한입 먹자마자 입안에 감도는 강한 감칠맛은 결코 뻔하지 않다. “손님들이 이 메뉴를 몇 배 정도 더 드시려고 대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어요.”

매장 한쪽엔 프라이빗한 식사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00% 고사리 전분만 사용해 만든 와라비 모치는 즉석에서 조리해 손님에게 대접한다
부산 출신인 두 셰프가 일본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식을 요리하던 원진희 셰프는 일본 특유의 음식과 도구를 대하는 태도에 매료되었고, 날 때부터 해산물과 요리를 좋아한 최현아 셰프는 로바타야키와 호텔 레스토랑을 거쳐 남편 원진희 셰프와 함께 도쿄행을 택했다. “매일이 꿈 같았어요. 첫 일본 레스토랑이었는데,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운 좋게 조리장이 된 이후 칸다 상한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배웠죠.” 각기 다른 스타일의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아온 두 셰프는 함께할수록 오히려 균형을 이루게 됐다. 칸다의 정갈함과 쿠로기의 강렬함 사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계절’이라는 키워드가 그 조화를 단단히 엮어준다. “계절 식재료를 다루는 일이 가장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재미있어요. 특히 한국은 일본보다 위도가 짧아 같은 시기라도 식재료 나오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늦기도 하거든요.” 그 차이는 단순히 식재료 수급의 문제를 넘어 메뉴 전체의 흐름과 감각을 조율하는 법을 익히게 했다. “이제는 제철에 맞춰 무엇을 써야 할지 바로바로 떠올라요. 몇 해 해보니 대체할 재료들도 자연스럽게 보이고요.”

불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화로를 다루는 최현아 셰프의 손길엔 오랜 시간 쌓인 내공이 묻어난다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인 쿠로기 소면.
가겐의 식기는 대부분 일본 작가들에게서 직접 공수해온 것이다. 평균 6개월정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식기 중에는 주문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다릴 정도로, 하나하나 장인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는 지나친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며 말렸지만, 요리 담는 그릇에까지 셰프의 손길이 닿아야 요리가 완성된다고 믿기에 이를 후순위로 미룰 수 없었다. 이런 세심함은 접객에서도 드러난다. 가겐은 고요하고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도 어느새 웃음이 흐르는 공간이다. “가끔은 긴장을 하는 손님들도 있어요. 그래서 손님이 좀 더 편하게 식사하시도록 요리뿐 아니라 공간 자체를 기분 좋게 하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고요한 품격과 여백의 미가 조화를 이루는 매장의 한쪽 구석.

제철 갯장어를 데쳐 가다랑어 육수로 완성한 여름의 오완은 육수를 붓는 타이밍과 그 온도에 따라서 맛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가겐의 최현아 셰프가 도쿄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칸다에서 조리장으로 근무할 당시 사용한 부채.
‘가겐’은 두 셰프의 이름 최현아의 ‘아(雅)’와 원진희의 ‘원(元)’을 일본식 발음으로 조합한 것이다. 그들이 익히고 배워온 요리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작명이다. 레스토랑 로고 또한 한국어를 사용하고, 일본어 표기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일본요리를 하되 한국에서, 한국 식재료로, 한국 사람들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철학 때문이다. 2025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 새롭게 등재된 가겐은 곧 2주년을 앞두고 있다. 좋은 셰프의 자질에 대해 묻자 ‘정직’과 ‘건강’을 답한 이들은 그 기본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자 결국은 오래 가는 식당을 만드는 힘이라고 믿는다. “가겐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이 가이세키를 경험하면 좋겠어요. 요리 하나하나의 순서와 흐름, 계절감, 식재료의 해석까지 담은 다이닝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계절이 메뉴를 바꾸고, 기억이 손님을 다시 데려오는 곳.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두 셰프는 오늘도 같은 마음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고, 정성껏 담아낸다. 계절과 요리,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교차하는 순간을 위해서.